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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선생의 ‘친일’ 시비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규명위)가 제시한 인촌 김성수 선생에 대한 ‘친일’의 근거는 당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게재된 기사가 전부다.

당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총독부의 기관지로서 특히 일제 말 전쟁시기에는 통치수단의 하나로 이용된 주구언론으로 일제의 선전, 선동물에 불과했다.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근무했던 한국인 기자들은 광복후 자서전 등을 통해 “일제 말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왜곡, 과장, 날조된 허위의 기사로 민심을 현혹시켰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인촌기념회는 위와 같은 구체적 사례들을 제시하며 판단의 기초자료인 당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믿을 수 있는 자료인지의 여부에 대해 관계 전문가들의 면밀한 검증이 먼저 필요하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규명위는 그러나 ‘아무리 친일기관지라 하여도 하지도 않은 일을 신문에 보도할 리는 없다.’며 강변하며 아무런 구체적, 학문적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정보도를 요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는 기막힌 기각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나라 현대사인 권위주의 정권시절에도 도입되지 않았고 하물며 악랄한 식민지배통치시절에 그것도 일제의 선전도구에 불과했던 친일신문에 ‘정정보도 청구’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규명위의 심의가 얼마나 의도적이고 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왜곡해석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정정보도 청구권이 도입된 것은 1980년 언론기본법을 제정하면서였다.


아래는 일제 기관지에 근무했던 한국인 기자들, 학병에 강제 징집당했던 인사들, 일제치하 유명인사들이 당했던 왜곡 날조 조작의 실태를 증언하는 기록들이다.

마지막의 대비 표는 같은 날 경성일보에 게재된 총독훈시의 내용 대부분이 인촌의 글에 나타난 것으로 날조된 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와 별도로 인촌기념회는 인촌에 대한 규명위의 친일결정에 반론자료와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당시 학생들의 생생한 증언 등을 동아닷컴과 인촌기념회 홈페이지에 올려둔다.

“청년을 고무하는 강연회나 글을 쓰도록 날더러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 홍명희 제씨(諸氏)와 교섭하라는 요지였다.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들의 요구를 따르고 말았다…(중략)…이러한 이야기는 잘못하면 한 개인의 명예에 본의 아닌 누를 끼칠 것이기 때문에 그 때의 시국이라든지 그 분들의 개인적인 사정 또는 그 밖의 여러 가지 환경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단지 나 개인의 직접적인 체험이기에 적어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극히 부분적인 이야기가 그 분의 생애를 판단하는 자료이기에는 아주 적당치 못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두려는 것이다.” (이원영 전 매일신보 정치부장, ‘언론비화 50편’, 한국신문연구소, 1978년, 95쪽)

“이러한 경우에는 나도 나름대로 감동하여 그대로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데스크에서 빨간 펜으로 고쳐 써졌다. ‘이제야 커다란 영예와 임무를 자각하여’ 운운으로. 이른바 각계 명사의 담화도 꼭 같았다…(중략)… 나는 김사연의 태도에서 오히려 상쾌함을 느꼈지만 신문 지면에 기사가 되어 나온 것은 거의 전부가 만들어진 것 밖에는 없었다. 이처럼 경성일보 편집국은 매일매일 이 같은 거짓을 만들기 위해 마치 모두가 정신이 돈 것 같았다.” (김달수 전 경성일보 기자, ‘나의 아리랑 노래’, 中央公論社, 1977년, 232~235쪽)

“일본 당국은 다시 소위 지도급의 인사들이란 것을 동원하여 학병 권유의 시국 강연을 시켰다…(중략)…전쟁 말기에 학도병의 동원이 성화같이 재촉될 때의 그 가두의 풍경, 그것은 마치 어린 양떼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엾은 광경이었다. 이리 몰리고 저리 쫓기고 피할래야 피할 구석이 없는 것이 그 때 우리 젊은 학도가 당한 봉변이었다. 나는 북경에 있으면서 국내에서 오는 신문을 읽을 때마다 학도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떼들의 모양같이 눈앞에 클로즈업되었다. 그래도 이들은 황은에 감읍하고 있다고 신문기사는 써내고 있는 것이다.” (백철 전 매일신보 기자, ‘속<續>·진리와 현실’, 박영사, 1975년, 109~112쪽)

“조선총독부에서 고관들이 지식인들과 접촉해서 ‘대학생들 군대 내보내게 해 달라’고 자꾸 강요했다. 그 일을 매일신보가 주동하라고 했다. 우리는 기관지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이 제대로 돌지를 않으니까 신문기자도 동원하게 되고, 또 신문사를 통해 가지고 유지들로 하여금 글을 쓰게 자꾸 강요했다. 매일신보에다가 기사를 좀 실리게 하라. 그래도 잘 일이 진행이 안 되니까 기자들에게 몇 명씩 할당하다시피 했다.” (전 매일신보 기자 김진섭 증언)

“매일신문이라는 건 그냥 뭐 총독부 기관지니까…(중략)…그때 급하고 뭐 신문은 나가야되는데 매일매일 오더가 떨어진다는 거지. 누구 이름으로 받아내라, 누구 거 받아내라…신문사에선 받아 낼 수가 없으니까 학예부 기자, 뭐 서너 명인데, 그거뿐만 아니라, 사회부 기자 뭐 해가지고, 순전히 앉아서 그것만 썼다는 거야….”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전하는 조용만 전 매일신보 기자, 전 고려대 교수의 말, 2009년 9월 7일 면담)

또 당시 학병으로 끌려갔던 인사들은 아래와 같은 증언하고 있다.

“동경서 귀성하는 한인 학생의 대열에 서도록 명령한다. 연락선은 연말의 귀성객을 만재하고 출항했다. 갑판에 즐비한 우리 한국학생들을 선실 아닌 소음이 요란한 선저의 기관실로 몰아넣고서 일장의 설교를 한다. 그리고 나서 경성일보 한 장 씩을 배포 받았다. 서울의 성대(城大)를 위시해서 각 전문학교에 진학했던 선배 동창들의 사각모 사진 일색이었다. 용약지원(勇躍志願)했다는 찬사와 아울러 각자의 포부마저 빼지 않고 날조 보도한 것이다.” (서석연, ‘그림자 잃은 사나이’, ‘1·20 학병사기’ 1권, 1987년, 185쪽)

“나는 깜짝 놀라면서 신문기사를 보니 연락선에 탔던 학생 전원이 수상경찰서에 가서 학병에 지원하였다는 사연의 기사가 아닌가! 승선 명부를 원서로 둔갑시켰구나! 아, 간악한 놈들···우리들을 속였구나, 이놈들! 하고 분해 했으나 그들의 함정에 이미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김영화, ‘전우여! 지금은 어디에?’, ‘靑春挽章’, 1·20 동지회 중앙본부, 1972년, 412~413쪽)

“일제는 너무나 조직적이었다. 하숙집으로, 학교로, 매일 고향의 집에서 친 전보가 날아들었다. 그 전보 내용은 모두가 ‘집에서는 승낙을 하였으니 하루빨리 학병을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 집에 돌아와서 보니 전보 친 일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관계 관청에서 조작으로 만들어 친 전보였다.” (윤임술, ‘특별 고사포 부대의 정체’, 위 책 290~291쪽)
여운형, 조만식 선생 등의 측근 인사들은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이른바 전향문 강제극이 있은 후 경성일보 기자가 와서 5분가량 면회하고 가더니, ‘여운형은 성전 완수에 적극 협력하고 나섰다. 특히 청년 학생들은 전쟁터로 나아가 목숨을 바쳐 황은에 보답하라고 소리 높이 권고한다.’ 운운의 장문 기사를 연 3일간에 걸쳐 연재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은 여운형을 이용하자는 일제의 새빨간 날조극이었다.” (이기형, ‘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 1984년, 237~238쪽)

“일제는 악랄하게 허위 보도로 ‘조만식 씨 드디어 전향하다’라는 표제 하에 학도병 출정 찬성, 날인과 자발적으로 유기(鍮器)를 헌납하고 성전(聖戰)에 적극 협력하였다고 대서특필로 보도하고 사진까지 게재하였다. 그러나 일제 주구 외에 이 기사를 믿는 자는 없었다.” (유기선, ‘황혼의 명상’ 제5화, ‘학도병 출정 때의 이야기’, ‘고당 조만식 회상록’, 고당 조만식기념사업회, 조광출판, 1995년, 51쪽)

“교활한 일제는 총독부 기관지에서 조선말 신문으로 유일한 매일신보에 조선인 전문학교, 대학교 학생들에게 ‘학도병에 지원해 나서라’는 안재홍의 이른바 ‘담화’를 날조해서 발표케 하는 사기 협잡극을 연출해냈다. 신문에는 안재홍의 사진도 실리고 자필서명도 있었는데 그 사진은 옛날 어디에서 찍은 사진을 오려서 낸 것이고 자필서명도 옛날 어느 신문에 난 것을 복사한 것이었다.” (김흥곤 강현만, ‘민족과 하나’, 평양, 금성청년출판사, 2003년, 381쪽)

“소설가 정비석 선생은 숙부로 나는 그 숙부 집에서 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그 때의 상황을 비교적 생상하게 기억한다. 일제 말기 명사나 시인들에게 일본 헌병이나 순사가 와서 학도병에 지원하도록 또 신문에 기사를 쓰도록 협박했다. 2,3일 생각해 보겠다하면 다시 와서 다그치고, 처음에는 부탁하지만 나중에는 협박해 반 정도는 불러주고 수식어 몇 자 붙여서 이름으로 내곤했다. 그 자리에서 자살하지 않는다면 안 쓸 수 없는 절박한 순간들이었다.” (정치근 · 시인, 작사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반민(反民) 해당의 조건은 대강 이상과 같은 듯 하나 남이 보기에는 또 얼마나 많은 죄목(罪目)이 있을지 모른다. 혹시 태평양전쟁 말기에 나의 명자(名字)를 도용한 위조 담화와 내지 마음대로 변조 개작한 신문 원고 강연필기 중에 또 어떠한 것이 있을지 모르되 이러한 것에 대한 책임까지는 내가 질 수 없으며…(중략)… 또 혹 전쟁말기의 모종 단체 참가 같은 것을 선전하는 이가 있으되 평생에 문화단체에 열명(列名)하기도 싫어함을 아는 이는 아는 바이며 다시 운위할 것 없는 일이다.” (최남선, ‘자열서<自列書>’, 자유신문 1949년 3월 10일자 2면)

최준 교수는 ‘한국신문사(韓國新聞史)’ (일조각, 1990년 신보판, 302~303쪽)에서 “이러한 군국조(軍國調)의 급격한 시국에 있어서…(중략)…당시의 매일신보는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하였던가. 반문할 필요조차 없이…(중략)…동지(同紙)에 종사하던 기자들의 개인적 사상 여하는 별문제이겠으나 지상에 나타나는 논조와 색채는 완전히 일제 침략주의의 앞잡이였음은 놀랄 필요조차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중략)…괴뢰적 허위 보도는 민중을 완전히 우롱 기만하였고 민생을 도탄의 구덩이로 유인하면서도 오불관언의(吾不關焉矣)의 그 태도야말로 한국 신문 사상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죄악면(罪惡面)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진석 교수는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 1’ (LG상남언론재단, 1998년 16쪽)에서

“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였고, 편집 방침도 총독정치에 협조하여 친일적인 논조로 일관되었는데도 삭제와 압수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매신의 압수는 제작상의 실수나 부주의에 의한 것으로 민간지의 필화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매신에도 삭제와 압수처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일제의 언론정책이 어떠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될 것이다.”고 밝혀 놓았다.

오늘날의 민족문제연구소가 있게 한 임종국 선생도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민족문제연구소 편, 2007년, 249쪽)에서 “총독은 이름 있는 인사들에게 꼭두각시 노릇을 강요하면서 온갖 협박을 자행하였다. 협박에 굴하지 않으면 명의를 도용해 가면서 허위로 날조한 학병 권유문을 발표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촌기념회가 1943년 10월 26일자 경성일보 조간 3면 ‘문무수련(文武修練)의 진가(眞價) 발휘(發揮)에’ 제하의 ‘김 보전 교장 담(談)’이라는 기사의 경우 문장의 3분의 2 이상이 같은 날짜 경성일보 석간 1면 총독 훈시 속 단어와 똑같거나 유사함을 예시하며 아래와 같은 글이 같은 날짜 신문에 실린 것이 날조된 기사의 예라고 보지 않는가? 라고 한 이의 제기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총독 훈시 인촌 명의 담(談)
국가 수요(須要)의 소중한 재목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忠良有爲의 皇國 臣民의 鍊成에 노력하는 국가 추요(樞要)의 재목으로 부족함이 없는 忠良有爲의 皇國 臣民의 鍊成에 매진할 것이나
일본적 세계관의 확립을 목표로 일찍부터 夙夜熱願시책과 함께 文武一途, 軍校一致의 대 정신을 강조하였던바 일본적 교학체제에 기초하여 文武一途, 軍校一致의 대 정신을 가지고
청년 학도 가운데 대학과 전문학교에서 공부하여 높은 교양과 깊은 수련의 공을 쌓아온 자에게 오늘처럼 국가의 기대가 큰 때는 없었고 청년학도 특히 대학 그리고 전문학교에서 공부하여 높은 교양과 깊은 수련의 공을 쌓고 있는 자에게 오늘처럼 기대가 큰 가을은 없고
내일의 졸업보다 오늘의 동원을 기대하는 것이다. 내일의 졸업보다 오늘의 동원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제야 이들 청년학도는 국가의 아주 큰 촉망 속에 文武修練의 진가를 충분히 발휘하여 훗날 역사가로 하여금 이 순국의 赤誠을 특필대서하도록 千載一遇의 기회를 만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청년학도는국가의 절대적인 촉망 속에 文武修練의 진가를 충분히 발휘하여 청사에 불멸의 공헌을 할 수 있는 千載一遇의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일본인 학도와 함께 폐하의 수족이 되어 황군의 일원으로서 殉國의 길을 闊步할 수 있게 되었다. 내지인과 어깨를 나란히 천황의 수족 되어 황군의 일원으로서 殉國之誠의 길을 闊步하도록 고무 격려하는 각오다.

인촌기념회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글이 대필됐음을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의 글(‘양호기<養虎記>,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7년, 114~116쪽)을 인용, 문제 제기했으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는 ‘시점이 명확하지 못하다.’는 등의 이유로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의 ‘양호기(養虎記)’ 속 글은 ‘양호기’ 발간에 앞서 동아일보 1974년 4월 29일자 5면, 편편야화(片片野話) 제50회에 실린 글이다.

이렇게 공공연히 공개된 전 고려대 총장의 글에 대해서도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일제의 충견(忠犬)이었던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며 ‘신문으로서의 기본은 지킨 신문’이다, ‘아무리 친일기관지라 하여도 하지도 않은 일을 신문에 보도할 리는 없다.’고 강변하며 옹호하고 하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는 또 전쟁시기 각종 관변단체의 간부 명단에 인촌 김성수 선생의 이름이 올랐다는 것을 ‘친일’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으나 그 같은 친일단체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친일적 행위를 했는지를 밝히지 못했다.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 중앙편(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4년)은 사전의 성격 3.에서
“이 사전은 인물보다는 단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따라서 사전에 수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로 규정할 수 없음을 밝혀 둔다. 강압에 의해 일시적으로 협력한 경우도 있으며, 당사자의 허락 없이 명단이 게재된 사례도 있다고 판단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만약 당시 보전 교장 김성수 선생이 ‘학병에 나갈 것’을 권유했다면 학병 또는 징병 대상자로 최대 피해자가 됐을 보전 학생들, 김성수 교장의 언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을 구순을 넘긴 분들이 한결같이 인촌 선생이 ‘학병에 나가라 한 사실이 없다.’고 분노하며 증언했다.

2009년 11월 27일 인촌기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