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과 일화

동아일보 창간호 동아일보 창간호
민족의 표현 기관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의 민족언론운동은 동아일보 창간으로 대표된다. 김성수는 일본 유학 이후 민족언론의 중요성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3·1운동 이전에는 일제의 철저한 언론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정치로 인해 한글 신문 출판이 가능해지자 신문 창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한 직후여서 재정적으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문 창간은 한국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신념은 확고했다. 담보물을 저당 잡혀 대출을 받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20년 4월1일 드디어 동아일보 창간호를 냈다. 동아일보는 당시 한국인들의 억눌린 한을 풀어주고 민족정신을 고양시켜주는 터전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일제 탄압이 가중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창간호가 간행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은 1920년4월15일 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이후 처음 동아일보의 판매와 배포를 금지했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을 당하는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통해 민립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맹 타파 운동, 한글 운동 등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민족주의 문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나갔다.

그는 또 1931년과 1933년 월간 신동아와 신가정을 창간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같은 문화운동을 펼쳐나갔다.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민족정신은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36년 8월25일자 동아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없앴다. 일제가 가만 있을리 만무했다. 총독부는 곧바로 동아일보를 무기한 정간시키는 등 갖은 탄압을 자행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그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인 37년6월3일 다시 발행되었다.

동아일보는 일제의 영구 폐쇄 음모로 인해 결국 40년8월10일 폐간됐고 광복 후인 45년12월1일 다시 발행됐다. 5년간의 공백기였지만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고양시키려는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민족정신까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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