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아시아의 횃불, <東亞>탄생

동아일보 창간 무렵의 인촌 김성수 동아일보 창간 무렵의 인촌 김성수

仁村은 신문발행을 결심한 다음 민족의 의사를 대변하고 민족사회의 목탁을 표방할 수 있는 신문의 이름에 대해 한동안 고심했다. 여러가지 제호를 놓고 숙의를 거듭했다. 그러자 연장자요 신문을 내자고 강력히 설득했던 유근이 발안했다.

"지금까지의 신문 제호는 대부분이 우리 국호를 따르거나 아니면 수도의 이름을 따르는 게 제일 흔하고 많았소.

여기서 예외라면 서재필 박사가 창간했던 독립신문이란 이름이오. 그 이름도 좋긴 하지만 어찌보면 무한한 게 아니고 유한하다는 걸 느낍니다.

지금은 나라를 잃었지만 언젠가는 되찾을 게 아닙니까? 그때 가면 독립이란 말은 그것으로 사명을 다합니다. 나는 이번의 우리 신문을 <동아일보>라 했으면 합니다. 지금은 비록 한때 일본의 속방이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고구려 시대부터 동아의 최강국으로 군림해 왔습니다. 일본의 기반에서 벗어나려면 옛날의 영광을 되찾도록 동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야 하며 조선민족의 시야를 세계로 넓혀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동아의 일원이라는 뜻을 강조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신문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신문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동아일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고 오늘날 그의 예상대로 아시아 굴지의 신문으로 세계의 신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빛나는 업적을 이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문발행 허가가 나오자 8일째 되던 1월14일, 仁村은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

이보다 앞서 신문을 해 보겠다고 결심을 굳힌 仁村은 당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사려 깊은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어느 기관이나 어느 개인이 소유하는 신문이 아니라 2천만 조선민중 전체가 소유하는 신문으로 만들어야만 명실상부한 민족의 대변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동아일보 역시 경방처럼 공개 주식회사로 발족시켜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전국 각지역을 대표하는 유력 인사들이 주주가 되게 하여 거국적인 언론조직체를 결성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仁村은 그 구상을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그는 장장 6개월 동안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지방 유지들에게 동아일보 주식을 사라고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애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동아의 주식뿐 아니라 경방의 주식까지 사라고 권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경방의 경우는 방직회사였기 때문에 주식을 사면 이익배당이 돌아 오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있지만 동아의 경우는 신문업이 원래 비영리사업이었기 때문에 돈만 투자하는 결과밖에 안 되니 모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주식이 뭔지 모르는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시킨다는 것도 땀나는 일이었다. 결국 동아의 주식을 산 이들은 모두 경방 때처럼 우리 손으로 우리들의 신문을 낸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구국운동의 일환이니 독립운동 자금을 내는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때의 어려운 사정을 경상남도 산청에 살던 유지 김모씨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동아일보 주식모집은 지지부진이었던 것 같습니다. 仁村 선생이 산청의 우리 집을 내방하신 것은 1919년 11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날씨가 꽤 추웠습니다. 仁村 선생은 그때 서상일씨와 동행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집은 조부때부터 농사를 많이 해 천석쯤 추수하는 시골 부자였습니다. 집안간의 발연으로 서상일씨는 좀 잘 아는 편이었지요. 그래서 주식을 사라고 서상일씨를 앞세워 와주신 겁니다. 仁村 선생은 처음 뵈었지만 그 고명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전라도 부자집 아들인데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달막한 키에 귀공자 같았습니다.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운 분이었지요. 진실하게 권유를 하시는데 딱히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난 난색을 표하며 주식 사라는 걸 거절 했습니다. 그때 한 주 가격이 5십원인가 그랬습니다. 그 5십원이 없어 거절한 건 아닙니다. 선생께는 말씀 안 드렸지만 제 아우 하나가 만세운동에 관여하여 심한 매를 맞고 석달 동안 옥살이 끝에 제가 뇌물을 써서 겨우 집에 빼내다 놨었습니다. 그런 사정인데 주식을 사라하니 지금 생각하면 달리 생각할 것도 없는데 그때 생각에는 동아일보 주식 사는 것이 마치 독립운동 비밀자금을 내놓는 것 같은 생각에 겁이 났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지요. 그래서 거절을 했던 것입니다. 주무시고 가라고 했더니 선생은 굳이 일어나시며 대구로 나가 봐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어찌나 미안한 지 좌불안석 하다가 난 5십원을 내드렸습니다. 날도 저물어가고 날씨도 추우니 <가시끼리>라도 불러 타고 가시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선생은 정중하게 사양하십디다. 내가 자꾸 우기며 받지 않으니까 선생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웃으면서 주식증서를 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성의가 고마워 그냥 받겠는데 이건 택시비가 아니고 그 돈으로 주식을 산 것으로 치자며 증서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난 너무도 미안해서 다시 차비를 드리려 했더니 염려 말라고, 기차역 있는 데까지 걸어서 가겠노라며 유유히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걸어가시는 그 분은 그렇게 거룩해 보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동아일보는 이듬 해인 1920년 1월14일, 발기인총회를 열게 되었다. 발기인은 78명으로 전국 13도, 각도의 유력 인사들이 다 망라되었다. 이리하여 창간 목표일은 만세시위 운동 1주년이 되는 3월1일로 잡아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자금난 때문에 기일을 지키지 못하고 총독부에 발행연기 신청을 내어 한 달 후인 4월1일을 발행일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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