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과 일화

1947년 2월 한 만찬회 석상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인촌 김성수 선생(오른쪽)과 AP통신원 러셀 브린스. 뒤쪽에 서 있는 사람은 윤치영 선생. 1947년 2월 한 만찬회 석상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인촌 김성수 선생(오른쪽)과
AP통신원 러셀 브린스.뒤쪽에 서 있는 사람은 윤치영 선생.
정치참여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반 닦다

광복 직후 좌우 갈등의 혼란기에서 인촌 김성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앞장섰다. 광복이 되던 그해 1945년 자유민주주의자 김성수는 송진우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결성했고 송진우가 암살되자 한민당을 이끌지 않을 수 없었다.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늘 뒤에서 일했던 김성수였지만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던 송진우의 죽음으로 인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듬해인 1946년1월 김성수는 한민당의 수석총무를 맡아 본격적으로 건국 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성수는 모든 세력이 함께 참여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김구(金九 1875-1949)와 이승만(李承晩 1879-1965)을 한데 아우르는 정당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

1948년 그는 비록 남한만의 정부수립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는 대원칙에 동의, 그 해 5월10일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가 제1당이 됨으로써 한민당은 야당이 되었고 김성수는 해방 공간 제1야당의 당수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김성수는 점점 노골화되어가는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하고 견제하고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1949년 자신의 한민당과 신익희(申翼熙1894-1956)의 대한국민당 등을 연합해 민주국민당을 만들어 이승만의 독재에 맞섰다.

6·25 전란의 와중에서 정치는 더욱 혼란스러웠고 이승만의 독재는 점점 교묘해져 갔다. 1951년 국회는 이시영(李始榮 1868-1953)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부통령 자리에 김성수를 선출했다. 그러나 김성수는 부통령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김성수는 그러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으로 부통령직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통령이 된 김성수는 이승만의 독재를 막고 실정을 고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특히 당시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나 방위군 식량과 의복을 빼돌린 국민방위군사건의 책임자를 주일대사로 임명하려는 이승만과 심각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김성수를 비롯한 각료들의 의견을 무시했다.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김성수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이듬해인 52년 5월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김성수의 건강 악화와 부통령 사임은 그를 이승만 독재에 맞설 수 있는 인물로 꼽았던 많은 사람들에겐 커다란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김성수는 이것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은 여전했고 이승만 독재에 대한 그의 저항도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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