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기념강좌

제12회 북한의 오늘과 내일

로버트 스칼라피노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 역사를 통하여 한국만큼 지정학적인 도전에 직면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아시아 대륙에 위치한 한국은 특정시기에 제국적 야망을 가진 강대국들에 의해 둘러싸여 그들로 하여금 북쪽이나 남쪽 모두의 진출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화랑을 제공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안으로선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책 대안이 가능했다. 첫째는 고립정책이고, 둘째는 다른 나라로부터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하나의 강대국과 동맹을 형성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의 강대국을 다른 나라에 대결시키거나 또는 서로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시키는 방법을 통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21세기를 앞두고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현재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고립정책은 더 이상 적절치 못하다. 역동적인 세계에서 고립정책은 스스로를 퇴보시키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역동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성격을 고려해 볼 때 배타적인 동맹정책 또한 의심스러운 방책일 뿐이다. 따라서 한국은 위협적이지 않은 강대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다른 강대국과 균형잡힌 긍정적 관계를 유지하는 혼합정책을 추구할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이것이 오늘날 한국이 취하고 있는 넓은 의미의 대외정책이라 할 수 있다.

지정학은 2차 대전 이후 한국의 비극적 분단을 초래하는 데에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의 위치를 고려해볼 때 소련군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이후 한반도에 진입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바다로부터 포위하는 전략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었다. 한국은 하나의 국가로서 일본의 지배로부터 즉시 해방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곧 소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2차 대전 중에 이루어진 미.소 간의 합의가 당시에 유효하였기 때문에 소련은 미국이 남한으로 진주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공동점령에 동의하였다.

처음에는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합의문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한국이 가까운 시일내에 다시 통일될 것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제안하고 있는 모스크바 협정은 대다수 한국인의 강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아무튼 이후의 미.소 관계를 고려해 볼 때, 한국이 통일될 수 있었을 것인지는 매우 의심스런 것이며 한국은 곧 이어 전개된 미.소 간의 강렬한 이데올로기 및 전략적 대립의 희생물이 되었다.

반세기 이상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공동의 역사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매우 다른 사회로 분단되어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 아마도 제3자의 입장에서 남한과 북한의 사회를 평가해보는 것은 한반도의 미래를 전망해보는 데 있어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먼저 북한-공식적 명칭으로는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분석해 보면, 경제적인 상황은 매우 암울한 상태이다. 현재의 식량위기는 널리 알려져 있고 북한 지도자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마 이 위기의 최고점은 지나갔을지 모르지만 영양실조와 기아현상을 고려해 본다면 식량위기의 여파는 미래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의심할 여지없이 농산물 생산이 급격하게 감소한 중요한 원인은 1995년에 시작하여 1997년까지 계속된 기상조건의 악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상여건 악화의 피해는 북한에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북한은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별로 많지 않으며 기후조건 또한 유동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다른 나라와의 계속적인 접촉을 통해 과학적 농업의 최신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분야에서도 북한의 정책은 주변국가의 과학기술혁명을 슬기롭게 이용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북한경제의 전체적인 측면을 검토해 보면 결정적인 취약점이 드러난다. 북한은 스탈린식 경제전략을 추구하면서 초기에는 소련으로부터의 원조와 지원, 그리고 소련보다는 적지만 동유럽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주체사상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소련에 대한 의존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었다. 어떤 시기에는 소련과의 교역량이 북한 전체 교역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으며 군사원조뿐만 아니라 상당한 정도의 경제원조도 이들 나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아울러 채무지불 연기와 '우호적인 희생' 또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소련의 붕괴는 북한이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였던 것이다.

소련의 원조가 없어지자 북한 경제전략에 있어 기술발전을 가로막은 자급자족정책, 빈약한 무역과 심하게 제한된 외국과의 교역, 중공업과 소비재 산업 간의 심한 불균형, 지나친 군비지출의 부담, 과도한 관료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동기부여보다는 강압의 방법을 사용한 것 등의 결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모든 스탈린식 경제체제에서 어느 정도 나타나는 이러한 결함들은 북한 경제에서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1989년 이후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매년 3-5% 혹은 그 이상씩 감소해 오는 것처럼 보인다. 1990년과 1996년 사이에 그것은 전반적으로 약 30%가 줄어들었으며, 이것은 1997년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도 있다. 현재 전체 GDP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이며 1인당 GDP는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남북한 체제의 근본적인 차이점에서 기인하는 계산상의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북한의 1인당 GDP가 남한의 1/4내지 1/10의 어느 지점에 있다고 믿고 있다. 심각한 전력난이 다른 어려움들에 더해지면서 북한의 중요 공장들은 단지 제한적으로 가동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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