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기념강좌

제1회 세계정치와 중국의 등장

로드릭 맥파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제1회 인촌기념강좌는 1987년10월12일과 14일 2차에 걸쳐 고려대에서 <세계정치와 중공의 등장>이란 제하에 하버드대 정치학교수이며 동교 존 페어뱅크 연구소 소장인 로드릭 맥파카 교수가 담당하였다.맥파카 교수는 1953년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LSE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다.그는 세계적인 중국 전문가로서 중국연구 계간지 '차이나 쿼터리'의 창설 편집장을 지냈으며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영국 하원의원을 역임하였다.맥파카 교수의 강연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오늘날 중공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와 현실은 크게 변하고 있다. 따라서 중공-한국관계도 과거와 비교할 때 간접교역 등 여러분야에서 놀랄만큼 달라졌다.

중공은 198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대만을 일본에 내준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와 개혁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근대화는 너무 늦게 시작되어 일본의 명치유신처럼 국민들의 힘을 결집시키지 못했다.

모택동은 자신의 전기를 쓴 미국언론인 에드가 스노에게 <신해혁명 이후 7년이 지난 1918년만해도 나의 가슴은 자유주의와 민주적 개혁주의, 이상적 사회주의가 뒤섞인 묘한 감정으로 가득찼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왜 모택동은 불과 3년 사이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하고 상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 참석했을까?

그 이유는 다섯가지로 볼수있다. 첫째가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중국 지식인들에게 권력장악 방법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이 중국의 젊은 애국자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킨 점이며 셋째는 이념적인 결속, 넷째는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세계 공산혁명을 위한 투쟁에서 소련의 지도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모택동이 소련식의 경제발전 모델을 부와 힘을 키워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1949년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건국을 선포하면서 군중들에게 <중국인민은 이제 일어섰다>고 말했다. 강력한 정부가 들어섰으며 열강들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는 탄탄한 기반을 얻은 중공도 대외적으로는 그렇지를 못했다. 아직도 초강대국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1950년2월 모택동은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과 만나 중소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에 새로운 판도를 형성하게 된다.

60년대와 70년대초 중공은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기위해 미국과 접촉을 시도, 1971년 미참내 키신저가 북경을 방문하게 된다.

중공을 그 가장 위험한 시기였던 50년대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소련으로 기울어졌으나 1960년대에는 두 강대국에 도전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면 중공이 이같이 세계무대에 등장하기 까지 모택동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1960년대 중소분쟁이 심각해지자 모는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 운용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모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눈을 돌렸다.

1968년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국들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 때 모는 이들을 <사회주의적 제국주의>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중공의 비난에 대한 소려의 보복은 1969년 우수리강을 사이에 둔 국경분쟁으로 이어졌다.

궁극적으로 중공지도자들은 자기나라의 국가이익과 국가안보를 가장 중요시하는 대외정책을 펴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제공산주의 운동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소련식의 사회 경제 모델을 도입하려했던 중공의 모택동은 점차 소련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된다.

그 첫번째 환멸은 경제분야에서 비롯됐다.

956년 시작된 중공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도중 모택동은 중공업과 경공업의 투자비율, 농업과 공업의 비용 등에 관해 이미 소련식의 경제모델에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같은 모의 개혁의지는 1958년 시작된 <대약진운동>에서 구체화됐다.

대약진운동의 본질은 중공이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는 인력을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경제개발의 속도를 급속화하자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에 발생한 문화혁명은 결과적으로 등소평에게 개혁정책의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문화혁명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중공사회에 새로운 평등주의 윤리를 심기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나는 현재 등소평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중공의 개혁정책을 <중국의 제5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개혁정책으로 인해 중공은 공산주의 국가로는 처음으로 사회주의 구조의 상당부분이 해체됐다. 어떻게 보면 1950년대초로 시계가 다시 돌아간 느낌이다. 농부들은 토지개혁 이전과 같이 땅을 자유롭게 생산에 이용, 관리하게 됐다. 이에 따라 농촌의 소득은 등소평이 집권한 이후 두배가 넘게 늘어났다.
도시에서는 실업자들이 상업이나 공업쪽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개인기업의 성격의 소규모 공장도 등장했다.

조자양은 1987년10월25일 제13차 중공당 전당대회에서 정치체제에 대한 보다 폭넓은 개혁안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부와 경제의 더욱 엄격한 분리를 의미한다.

1971년대말 등소평이 권좌에 다시 돌아왔을 때 중공 바깥의 세계는 많이 변해있었다.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등 동아시아 각국은 경제적 기적을 이루고 있었다. 등은 중공이 문화혁명과 같은 사건으로 다시는 퇴보하지 않기 위해서 중공을 외부세계에 개방하고 중국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봉건적이며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바꿔놔야 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등은 자신의 개방정책을 명조이후 중국인들이 고집해온 고립정책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개방정책에는 우려도 뒤따랐다. 중공내 보수주의자들이 서구의 기술과 경영방법을 도입해야 하는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의해 정신적 타락이 초래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등의 개혁이 방해 받는다면 그의 연약한 후계자는 외국과의 접촉을 끊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또 등의 개혁이 충분히 성공할 것이며 그의 후계자가 개방정책을 줄기차게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낙관적 견해도 있다.

이러한 등의 개방정책은 중공이 소련과는 적대적이면서도 미국과는 친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뒷받침될 수 있었다. 앞으로 수년동안 미-중공 관계가 중소 관계보다도 훨씬 더 밀접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추측이다.

이제 중국이란 대륙은 다섯차례의 혁명과 한세기 반에 걸친 혼란 끝에 더 이상 잘못된 길로 들어설 여유가 없게 됐다. <사회주의 국가건설>이란 목표를 위한 등과 그의 후계자들의 개방정책은 외부세계의 지원을 많이 받아야 성공한다. 중공의 영향력이 앞으로 동아시아 뿐 아니라 세계전역에 더욱 널리 미칠 것으로 보이며 이같은 중공의 개방정책은 결국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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