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이희승(李熙昇) 헌시(獻詩)

이희승 국어학자



공(公)을 먼저, 사(私)는 뒤로 돌려라!
선생의 생활신조였다.
마음의 응어리였다.
아니, 전생애였다.

선생께 배우기를 2년
모시기를 20여년
그 모습, 그 정신
우러러 받들기를 오늘날까지
그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한 것
선생은 신조 그대로였다.

어찌 그럴 수가 있나!
사람은 가족이 있다.
사생활도 있다.
따라서 사정(私情)이 있고 계누(繫累)도 있고

그런데, 아니었다.
선생은 아니었다.
공에는 추호의 사정(私情)도
용납이 허락되지 않았다.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목석이랄까, 백치랄까, 성자랄까
한 마디로 선생은 초인이었다.

학교를 세워보려
어버이께 자금을 빌었으나
좀처럼 허락이 내리지 않았다.
방문을 안으로 잠그고
단식을 결행하여
그리 하기를 사흘 동안
마침내 승낙이 떨어졌다.
그러나, 신설은 불허가로 끝나
폐교 지경의 중앙학교를 맡았다.

비밀리에 전인(專人)을 시켜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기도
그러나 그는 상해로 가지 않고
만주등지에서 장사판에 휩쓸려
그 거액을 다 날려 버렸다.
몇해 후 면목없이 귀국하였을 때
선생은 그에게 질책(叱責) 새로에
그 건에 관한 한
한 마디도 묻는 말이 없었다.

민족자본의 육성을 꿈꾸고
산업진흥의 한 가지 표본으로
경성방직을 설립하였을 때
운영의 책임자인 이모씨는
일본 대판 삼품시장에서
과욕의 투기로 거액을 날렸다.
신설 직후의 큰 재변이었다
간부회의에서 격론이 일어
퇴사시키자는 최종의 의결

-그는 능력 있는 기술자요
그를 내보내면 돈 잃고 사람 잃고
두 가지를 다 잃게 되오
한 가지(돈)만 잃는 것이
현명한 일 아니겠소?-
인촌 선생의 말씀이었다.

이 조치에 그는 너무도 감격하여
그 후 경방의 발전을 위해
발분망식(發奮忘食)으로 일생을 바쳤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안으로 겨레의 혼을 깨우치고
국제적으로 민족의 위용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막강한 일제의 무력 앞에
진짜 독립은 가망이 없었다.

결국은 힘이다!
선생은 외쳤다.
원대한 목표로 힘을 기르자
아는 것이 힘이니, 교육을 지키자
정보도 힘이니, 신문을 만들자
경제적 힘이 힘 중의 힘이다.
민족자본의 축적을 꾀하자

중앙학교 고려대학
동아일보
경성방직
선생의 이 3대산업은
태산같은 중압에 굽히지 않고
형극의 험로를 뚫고 헤치고
마침내 성공의 빛나는 깃발
공(公)을 위하는 불굴의 정신

겨레의 일이라면 누구든지 도왔다.
남 모르게 쓴 숨은 재물이
그 얼마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그 마음의 깊이, 그 원대한 안목
그 천공해활(天空海活)의 굉대(宏大)한 도량
진실로 선생은 민족의 태양!

선생의 분신이 몇 군데 서 있다
여기 선생의 고향 마을에
분신 아닌 선생의 본체가 섰다
공(公)을 먼저, 사(私)는 뒤로 돌려라!
진실로 선생은 초인이시다
민족의 태양은 낙일(落日)이 없으리

1983년 8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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