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인촌 김성수의 기업활동과 경영이념

황명수 단국대 부총장 역임 개항기의 민족기업가는 국권수호를 위하여 애국의 일념으로 민족기업을 설립하였으나 기업여건이 성숙하지 못하여 많은 경우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비해 3·1운동 이후에 설립된 민족기업은 거개가 실패하지 않았다. 경성방직의 설립은 민족기업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즉 힘을 합치면 민족기업은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인촌의 기업동기는 민족주의 정신에 입각하고 있었다. 그는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국권의 회복과 이에 대비하기 위한 민족경제의 자립과 민족의 실력배양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 바로 경성방직회사의 설립이었던 것이다.

인촌의 민족주의 정신은 경성직뉴 회사의 인수 운영과 경성방직회사의 설립 운영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인촌이 면방직업에 착안한 것은 그가 면방직업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촌이 수익이 많은 고리대적 금융업이나 소작료가 높은 토지의 매입에 투자하지 않고 기업운영의 여건이 훨씬 불리한 면방직업(제조업)에 투자한 것은 서구의 산업혁명이 면공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촌은 자립경제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면방직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념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 실천에 옮긴 증거가 바로 경성직뉴회사의 인수 운영이었고, 경성방직회사의 창립인 것이다.

인촌의 기업동기는 민족주의 정신이고, 그의 경영이념은 공선사후=국익우선의 사상이다. 인촌이 경성방직회사의 설립을 위하여 전국8도를 구석구석 순회하면서 주식을 모집한 것은 경방을 조선민족의 회사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1인1주>운동이라든지, <조선사람은 조선 사람의 광목으로>라는 표어를 앞세운 마케팅 활동은 모두 그의 민족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취해진 행동인 것이다. 그는 이를 거족적인 운동으로 이끌어 간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경방제품의 판로를 넓히기 위한 운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구한말의 한국 국기를 모방한 <태극성>상표의 경우도 그의 민족정신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것이 이강현의 아이디어라고 하지만 인촌의 결단이 없으면 그 실현은 어려웠던 것이다.

인촌이 민족자본과 민족기술만으로 경방을 설립 경영한 일이라든지, 사원 채용에 있어서 응시자격을 조선인에 한정시켰다든지 하는 일은 그 모두가 인촌의 민족주의 정신이 반영된 것이다.

한말의 민족기업이 대부분 설립 후 몇 년 못가서 도산한 것에 비해 인촌이 설립한 경성방직회사는 초창기의 어려운 기업 여건 아래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마침내는 대규모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것은 인촌의 민족기업을 훌륭히 키워보겠다는 창업정신과 이 정신을 이어 받은 인촌의 아우 김연수의 굳은 의지와 탁월한 경영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경성방직의 설립에 있어서는 전국의 유지들이 민족기업을 키우기 위해 경방의 주식을 사는 등 적극적인 협조를 하였다.

인촌은 인재기용에 있어서도 탁월한 경영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영자의 경영능력이 자본조달, 시장개척 그리고 인재기용에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인촌은 그러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인촌은 경성방직의 경우는 이강현 박용희 김연수 등 뛰어난 인재를 배하에 두었고, 동아일보에서도 고하 송진우를 비롯하여 유능한 인재를 두었다. 중앙학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촌은 자기가 창설한 사업은 이를 경영할 수 있는 적격자에게 맡겼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성방직회사의 성공은 일제식민지하의 많은 민족기업가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었고, 그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인촌의 경영이념은 공선사후=국인우선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공선사후의 정신은 그의 생활신조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촌의 생활신조내지 좌우명은 <공선사후>와 <신의일관>이었다. 공선사후의 정신은 공우선 즉 국익우선의 정신이다.

그는 국익을 위해 기업(경방)을 건설 운영하고 고용의 기회를 확대하고 거기에서 얻는 과실로 사회에 봉사하려 한 것이다. 경방이 양영회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것은 기업 과실의 사회 환원의 한 예이다.

<신의일신>의 정신은 인촌이 평생 지켜온 좌우명이다. 그가 경방의 초창기에 삼품사건으로 회사를 도산의 위기에 몰아넣은 이강현에 대해 모든 간부사원이 파면을 요구했으나 그를 파면하지 않고 그에게 계속 회사의 주요 요직을 맡겨온 것은 이강현과의 신의를 끝까지 지킨 유명한 일화로 되어 있다.

인촌은 기업가요, 교육자요, 언론인이요, 정치가였다. 그는 민족기업으로서 경성방직을 창설하였고, 민족교육기관으로서 중앙학교 고려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민족의 언론기관으로서 동아일보사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해방 후 그는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지도자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업 교육 언론 및 정치의 모든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기업활동에 한하여 보면 그는 슘페터가 말하는 창조적 기업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창조적 기업가로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기업 교육 언론 및 정치의 모든 분야에서 창의적인 활동을 해온 지도자형의 기업가라고 할 수 있다.

'평전 인촌 김성수'(1991. 동아일보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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