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언론인 인촌 김성수

정진석 한국외대 신방과 교수 식민지 초기과정에 살았던 인촌 김인촌 김성수는 언론 경영인으로서 우리나라 언론사에 우뚝 솟은 거봉이다.
그는 언론 일선에서 글을 쓰거나 제작을 지휘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암흑의 일제치하와 해방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35년간에 걸쳐 언론계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면서 때로는 언론의 후견인으로서 우리나라 언론 발전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인촌이 근대 한국사에 남긴 업적은 언론계에 국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활동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분야에 폭 넓게 망라되어 있다. 언론 경영보다는 교육계에 더 오래 종사하였던 교육자였고, 일제치하에서는 '재벌'이라 불리던 기업인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정당의 지도자로도 활약하여 부통령을 지난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가 언론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여 남긴 업적은 그가 한국 언론을 대표하는 동아일보를 육성하고 이끌어 온 언론인이었다는 공적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인촌이 일제하의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 동아일보를 육성하였고, 광복 후에도 동아일보를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기관으로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아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면서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여론 형성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사람이라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업적은 하나의 언론기관을 육성하여 민족언론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평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것은 인촌이 살고 있던 시대의 우리나라 현실이 동아일보를 여러 개의 신문 가운데 하나의 신문이라는 위치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의 동아일보는 민족진영을 대표하는 표현기관이라는 책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20년대 초반과 중반에는 일제의 언론탄압에 대응하면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30년대의 동아일보는 한때 민족지라는 명칭을 붙이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30년대로 넘어오면서도 문자 보급운동, 농촌 계몽운동과 같은 국민운동을 전개하였으므로 민족정신을 고양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광복 이후 좌우익의 대결과정에서도 동아일보의 역할은 컸다. 동아일보는 우익진영의 중심기관이 되었고, 인재의 양성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정계 재계 학계 문화계 등의 각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들이 동아에 모였고, 동아를 거쳐갔다.

인촌이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재직한 기간은 긴 편이 아니었다. 인촌은 때로는 언론 경영인으로서 전면에 나서기도 하였으나, 더 많은 기간 동안 배후에서 동아를 육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가 일제치하에서 동아일보의 사장을 맡은 기간은 햇수로는 통틀어 4년5개월이다. 1920년7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와 1924년10월부터 1927년10월까지 두 차례였다. 그 나머지 기간에는 동아일보를 직접 경영하지는 않고 공식적으로는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해방후에는 1946년1월부터 1947년2월까지 1년2개월간 사장에 재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지 않는 기간에도 동아일보 하면 김성수를 연상할 만큼 동아일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양자의 밀도 높은 연관성은 외형적인 물질면에서도 그러했으며 내형적인 정신면에서 또한 연면히 유지되어 그 일평생을 꿰뚫었다."는 말은 적절한 평가라 할 수 있다.

김성수가 동아일보의 사주로서 일제하의 어려운 여건, 그리고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과 6·25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우후죽순처럼 난립한 여러 신문들 가운데서 동아일보의 위치를 확고하게 끌어올린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그의 성실한 인격과 신의가 언론 경영인으로서 성공을 거두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가까운 거리에서 김성수를 지켜본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어찌하야 다수 출자자 중의 일인으로서 금일에는 이 양대기관 주식회사(동아일보사와 경성방직주식회사)의 주인이 되었는가. 그것은 그의 신의와 성충이다. 대전이 끝나고 세계적 대공황이 조선을 습반하게 된 때에 출자를 약속하였던 사람들은 다 나가 자빠졌다. 발기인들까지도 다 모르는채 달아나서 그래서 동아일보도 문을 닫히게 되고 경방도 면사표 폭락으로 파산할 위기를 당하였다.

이 때를 당하야 김성수는 양부 김기중옹에게 탄원하야 소유 토지문권 전부를 직산은행에 저당하고 이십만환의 빚을 얻어서 두 회사의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그 자(子)도 자(子)여니와 부(父)도 부(父)다. 이 의사적이오 용사적인 행위는 김성수에게 대한 신망과 감사를 제래하였다. 여기에 감동된 기개 인사가 절대의 신용을 그에게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는 그의 재력이다. 그는 일제하의 자본가로서 '재벌' 또는 '김성수 콘체른'이라고 부를 만한 재정적인 뒷받침을 가지고 있었다.

김성수는 동생인 김연수가 경영했던 해동은행, 고무신 제조와 무역업을 하는 경성상공회사 등을 합쳐 1930년에는 5백만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인천들의 재산까지를 합치면 약1천만원을 동원할 실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1931년12월에는 경영난에 빠져 있던 보성전문학교까지 인수하여 사회적 명망도 높아갔고, 사업은 확장일로에 있었다. 이와 같은 김성수의 재력은 동아일보를 3대 민간신문사 가운데 가장 안정된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월급도 많고 제 날짜에 급료가 어김없이 지급된다는 사실 때문에 경영상태가 어려웠던 다른 신문 종사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동아일보 부장급이면 고등관의 초임급 군수와 비슷한 급료 수준이었고, 평기자도 6~7년 경력의 군서기보다 높은 정도였다.

셋째, 김성수의 주변에는 그와 일심동체가 되어 그를 보좌하는 인재들이 많았다. 그의 주변에는 실업가였던 아우 김여수, 신문에는 송진우를 비롯하여 장덕수 이광수 이원모 백관수 등이 있었고, 은행에 문상우, 방직에 이강현 이태노, 그리고 학교에 최두선 등 쟁쟁한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당시로서는 "근대식으로 사업을 벌인 재산가가 있다면 누구든지 인촌 김성수"를 첫손에 꼽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였다.

언론인으로서 김성수를 도왔던 사람 가운데서는 김성수와 "일신양면"으로 표현되는 송진우가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였다. 1931년 발행된 월간지 혜성은 두 사람의 사이를 한 쌍의 부부로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물론 두 성격은 전연 다른 점이 많다. 일을 착수 혹은 진행하는데 있어 김씨는 소극적인데 반하야 송씨는 적극적이다. 약간 성이 급한데 반하야 송씨는 뱃심이 나온다. 김씨는 돈을 모으고 송씨는 돈을 쓴다. 김씨는 쪽을 맞추고 짝을 짓는데 반하야 송씨는 떼어놓고 벌려 놓는다. 김씨는 군자적으로 얌전하며 살림꾼인데 반하야 송씨는 외교적이고 수호지식이다. 김씨는 차분하니고요한데 반하야 송씨는 거칠다.김씨는 군자적으로 공평한데 반하야 송씨는 정치가적으로 다소 당파적이다. 이상과 같이 송,김 양씨는 서로 반대되는 두 성격을 잘 종합하여 가지고 오늘날의 사업을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김씨가 없었으면 오늘날의 송씨와 그 사업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요 송씨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김씨와 그 사업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한 사람으로 설산 장덕수가 김성수를 보좌하였다. 장덕수는 동아일보 창간때에 주간으로 있다가 주식회사가 설립된 1921년9월부터 부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1923년4월에는 미국 유학을 떠나 1936년에 귀국하였는데, 김성수는 장덕수의 유학기간 중에도 부사장으로 대우하여 년 2천 수백원 씩의 가족 생활비를 전담하였다. 장덕수의 형 장덕준이 북간도에서 취재도중 일본군에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공로를 생각한 점도 있었겠지만 장덕수에 대한 이와 같은 배려는 김성수가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고 한번 신임한 인재는 끝까지 돕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성수의 주변에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동아일보의 발전과 오늘에 이르는 역사는 김성수의 탁월한 경영 수완과 인재 포용력에 힘입은 바 절대적이다.

인촌의 언론정신은 한마디로 "공선사후"라는 그의 좌우명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으며, 그가 우리나라 언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거목이 되었던 것은 겸손한 가운데도 신의와 의지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전 인촌 김성수'(1991. 동아일보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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