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김성수의 정치이념에 대한 사상적 이해

진덕규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식민지 초기과정에 살았던 인촌 김성수의 일관된 사상체계는 식민지의 상황에 있었던 다른 나라의 민족운동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의하여 다시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기본 바탕으로 하였다. 그의 사상은 다음 세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민족 주의 사상이었다. 둘째,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지향이었다.

셋째, 서구 합리주의의 수용을 강조하는 계몽적 지향이었다. 이 세가지 사상은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있기 때문에 때로는 민족주의가 강조되기도 했고 때로는 계몽적 인식논리가 바탕을 이루기도 했으며 그런가 하면 민주주의적 가치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다만, 그가 실제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던 3·1운동을 전후로 한 시기에서는 민족주의적 사상이 강하게 깔린 계몽적 활동이 주를 이루었고 다시 1945년의 해방이후에는 민주주의 사상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상황에 따른 이념의 부분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인촌 김성수의 이러한 사상과 실천은 그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판의 초점이 되어왔다. 이러한 논의는 대체로 다음 두가지의 비판적 논지로 이어지고 있다.

첫째, 그의 사상적 지향이 개량적 민족주의의 범주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것이 일본총독통치에 대하여 타협주의적 경향으로 떨어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 그의 정치행위의 보수주의적 성격은 그가 놓여 있었던 거대 지주라는 사회경제적 신분의 반영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적 반동성을 보여주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는 인촌의 기본적 정치지향의 의식과 이념을 고려하고 그의 실천적 방략을 함께 고찰한다면 그것이 지나친 감정적 논리의 표현이라는 지적이 가능해진다.

가령 첫째의 비판에 대한 논의만 해도 그 당시의 상황에서 민족운동을 어느 한가지 방안만이 절대적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병이나 독립군과 같은 방법으로 조국광복을 추구하는 무장투쟁의 민족운동이 있다면 국내의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민족운동으로서 민중의 계몽과 그것에 의한 민족의식의 고양이라는 목표를 구현하려 했던 문화중심의 민족운동도 가치가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국내의 상황에서 무장투쟁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는 점과 그것을 시도했을 경우 부딪치게 될 결과를 고려한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민족운동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사실은 문화적 민족운동과 무장 투쟁의 민족운동이 하나로 결집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고 민족운동의 동일전선을 형성하여 상호 연계적인 보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국내의 김성수 등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던 민족운동은 외국의 무장투쟁운동과 사실상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민족운동을 단순히 개량주의적이라고 규정하고 그러한 민족운동을 저평가하려는 인식에 상당한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할 때 만일 그 시대에 민족교육을 할 수 있었던 교육기관이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제외한다면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룩되었다고 강변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동아일보의 민중교육적 활동이 언론을 통하여 이룩되지 못하였다면 과연 그처럼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민중교육적 민족의식의 고양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보성전문과 중앙학교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하여 어울리고 상호 격려하면서 민족의 문제를 숙의하고 민족의 미래를 지도할 지도자의 활동이 다른 어느 곳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가능했겠는가.

물론 이러한 물음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반론이 현실상황을 전제로 하여 논의될 수 있어야 설득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단순히 관념적 재단만으로 한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인물을 평가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오히려 바람직한 인식은 무장투쟁의 민족운동의 가치성을 인정하고 국내의 사회주의적 민족운동의 의미도 받아들인다면 문화중심의 민족운동의 본질에 대한 평가도 동등한 관점에서 이루어져서 이들 사이에 연계성을 구축할 수 없었던 심한 분파성의 이유에 대하여 민족운동의 책임이 물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로 제기된 인촌에 대한 보수주의적 경향의 비판만 해도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그의 사회적 신분이 거대 지주이기 때문에 보수적이라는 등식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논리로 생각된다. 물론 그는 대지주의 자제이고 부르주아지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속성이 바로 보수적이라는 평가로, 그리고 그러한 보수주의적인 것이 마치 한국사회에서 제약조건이 된 것처럼 인식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촌의 경우 그의 재산이 단지 보수적인 계급구조를 유지하는 것에 치중되어 사용되었거나 사적 이해에 충당되었다고 할 수 없는, 오히려 어느 의미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의 전체적인 발전에 기여적인 것으로 활동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성격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보수적인 경향을 가진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 자체가 평가에 흠이 될 여지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수주의도 한 사회의 지속적 발전에 기여적이기 때문이어서 보수주의적 가치와 전통이 어떻게 발전지향을 보여줄 수 있는가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지, 인촌의 경우 그가 보여준 보수주의적 성격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지속적 발전의 계기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른 평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인촌은 그의 삶의 전반적인 궤적 자체가 민족과 사회의 전진에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으며 그가 보여준 행동의 기본 양식은 하나의 중요한 행위기준으로 남아 있다. 그가 이룩하려 했던 가장 중요한 이념적 지향은 현대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새로운 민족주의적 사상과 시민민주주의의 올바른합일을 통한 평화로운 조국통일과 발전을 이룩하는 것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평전 인촌 김성수'(1991. 동아일보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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