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 70주기 추모식
오늘은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70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선생께서 떠나실 때 12살 초등학교 5학년생이던 소년이 70년의 세월이 지나 이 자리에서 추모의 말씀을 드리게 되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때 그 소년은 하늘이 맺어준 일대사 인연으로 선생께서 세우신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여 자유, 정의, 진리를 배우고 사회에 나와서는 선생의 좌우명인 공선사후-신의일관의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올바른 법조인으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2년 전부터는 인촌기념회 이사장을 맡아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먼저 저에게 가르침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고 삶의 지표를 밝혀주신 선생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인촌기념회 이사장을 맡은 이후 선생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새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과 나라를 위한 선생의 생각과 실천이 헌신적이고 크고 숭고하다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6.25 전쟁 시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지금의 우리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어찌 보면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민족이 존망이 걸린 가장 처절한 시간과 공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시기에 선생께서는 교육으로 나라의 기초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중앙학교와 보성전문-고려대학교를 세우고 경성방직을 창업하여 산업으로 나라에 보답하셨습니다. 동아일보를 창간함으로써 나라의 힘을 키워나갈 동력을 굳건히 하셨고, 민주주의 기틀을 다져서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앞장서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제시하고 스스로 개척하셨습니다. 이는 선생의 소명 의식이 빛을 발휘한 덕분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선생의 이러한 업적은 세상에 훨씬 덜 알려져 있고, 일부 사실은 잘 못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의 삶을 좀 더 탐구해서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아 널리 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지난해 4월부터 선생의 삶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고창, 담양, 군산, 서울, 일본 도쿄 등 선생께서 한발 한발 지나쳤을 곳을 찾아가 선생과 함께 삶을 살았거나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자료도 수집했습니다. 선생의 동지였던 고하 송진우, 근촌 백관수 선생의 후손들도 만나고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와 김상오의 처남 홍병표 선생을 직접 만나 인터뷰도 했습니다.
선생께서 젊은 시절 처음으로 신학문을 배운 담양 창평의 영학숙 상월정, 부안의 내소사 청련암, 군산의 금호학교와 궁멀병원 째보선창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서울의 중앙학교와 동아일보가 있던 화동 옛터로 시작해서 선생의 숨결이 살아있는 북촌 일대를 일일이 찾아다녔습니다. 3.1운동의 발상지인 책원지와 중앙학교 기숙사도 여러 번 들렀습니다. 보성전문 학교터와 고려대학교를 찾은 것은 물론이고 경성방직이 있던 영등포 공장 터를 둘러보았습니다. 일본 도쿄에서는 2.8독립기념관을 참관하고 와세다대학을 찾아가 대학관계자도 만나 보았습니다.
이런 탐사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면서 새로운 자료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의 젊은 시절 행적을 쫓아가면서 다시 깨닫게 된 선생의 용기와 혜안에 대해 저희들의 왜소함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장년이 되신 이후 중앙학교, 보성전문의 인수와 기미독립운동의 기획과 실행, 그리고 동아일보를 창간하시고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이를 지켜내신 인내와 뚝심 앞에서는 저절로 머리가 숙어지고 가슴은 존경의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선생의 4남 김상흠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함흥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면회 한 번 가보지 못하신 비통함과 이를 빌미 삼아 선생을 회유하려고 하였던 춘원 이광수와 의절하려고 하신 선생의 결기를 대했을 때 느꼈던 진한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해방 이후 농지개혁을 단행할 때 선생과 선생의 가족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농지를 대의를 위해 기꺼이 내놓으신 공선사후의 실천 비화를 접했을 때, 그리고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부통령직을 내려놓으신 사임서를 읽어 내려갈 때에는 가슴이 메어 많이 울었습니다.
8개월이 넘는 탐사 길을 통해 『인촌탐사 : 밝은 길을 찾아가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운 많은 것들 중에서 제일 큰 선생의 덕목은 아래와 같다고 감히 말씀 올립니다.
“선생께서는 설령 이익이 보여도 그게 바른길이 아니면 가지 않으시고, 손해가 나도 그게 바른길이면 그래도 꿋꿋하게 걸어가셨습니다. 또 선생께서는 큰 공적을 이루고도 이를 내세우시거나 거기에 기대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공은 어디로 가지 않고 그대로 지금까지 우리들 곁에 남아있습니다.”
끝으로 반가운 소식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선생께서 태어나신 고창에서는 <인촌 선생을 재조명하자!>는 자발적인 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조만간 광주에서 큰 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젊은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도 참여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소식이 있는가 하면, 지난 연말 이후 국가적 고난과 혼란의 시간이 다가온 상황입니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강조하고 실천하려고 하셨던 ‘통합의 리더십’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이라 믿습니다. 저희들은 선생의 이 <통합의 리더십>을 되새겨 이 난국을 현명하게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그때까지 잘 지켜봐 주시면서 대한민국에 큰 힘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민족의 스승이셨고, 국가의 큰 어른이셨던 선생의 명복을 빌며 삼가 추모의 글을 올립니다.
2025년 2월 18일
인촌기념회 이사장
이진강 올림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0.11~1955.2.18) 선생은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 사업가로서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신 분이며, 한국 현대사에 폭넓은 발자취를 남기신 애국의 거목이십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해외에 망명하여 투쟁한 애국 투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국내에서 일제의 압제를 몸소 겪으시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선생은 한민족이 일제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나서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언론과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자주적 역량을 배양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도 자립해야 한다는 사상을 실천했던 선각자였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좌우익이 대립하던 혼돈의 시기에는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해 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을 결집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수행하셨습니다. 오늘 선생의 70주기를 맞아 선생께서 남기신 불멸의 업적과 공선사후(公先私後)―공을 앞세우고 사적인 이익을 뒤로 미룬다는 애국정신을 다시 돌이켜 보면서 작금의 혼돈스러운 정치현실에서 선생의 업적과 애국애족 정신이 더욱 그리워짐을 느끼고, 깊은 추모의 마음을 표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국내의 항일은 국외의 항일과 연계하여 누적된 성과를 거둔 독립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내의 항일은 국외의 항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한 평가를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군국주의 일본의 강압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전쟁의 광풍이 불고 있던 시기에 나라 안에 살면서 일제와 맞서 가시적인 항일운동을 펼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는 식민 치하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해외의 항일투쟁도 국내의 항일에 크게 의존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국내의 직·간접적인 호응과 지원이 없었다면 국외의 항일투쟁도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해외와 국내의 항일은 어떤 형태였건 연대감을 형성하였고, 상호보완의 관계였습니다. 선생은 국내에서 문화적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주역이셨습니다.
교육과 언론은 국내 항일의 양대 산맥이었습니다. 동아일보와 보성전문, 중앙중학은 민족진영 인사들의 활동무대이자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은신처였습니다. 선생은 언론과 교육기관을 동시에 운영한 유일한 지도자였습니다. 동아일보와 보성전문을 거쳐갔던 인물들은 광복 후 정계를 비롯한 언론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건국의 중추 세력이 되었고 민주화와 산업화의 역군이 되었습니다.
개화기 이후 우리는 구습을 타파하고 선진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열망이 드높았습니다. 국력이 기울었던 원인이 고루한 사상과 실용적인 교육의 부재에 기인하였다는 깨침이었습니다.
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친 뒤에 교육입국의 실천에 나섰습니다. 총독부가 무단정치를 강행하던 1915년 4월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오늘의 기준으로는 아직 성인으로 보기에도 미흡한, 나이 스물다섯 살에 불과한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선생은 민족이념이 투철하고 덕망이 높은 지사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학교의 건학이념을 다져나갔습니다. 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두선(崔斗善)과 같은 유능하고 덕망 높은 인사들을 영입하고, 교장에 유근(柳瑾), 학감에 안재홍(安在鴻)을 맞아들이면서 자신은 평교사로 영어와 경제를 강의하였습니다. 1917년에 교장에 취임하였을 당시는 서른 살이 안 된 스물일곱 살 젊은 청년이셨습니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선생이 교주(校主)였던 중앙학교는 민족 항일운동의 발상지였습니다.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이 3·1운동 48인에 포함되어 투옥된 사실이 이를 증언합니다. 교육사업은 세계적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신 선생은 1929년 말 해외 순방 여행길에 올라 1년 8개월 동안 영국과 유럽 등 서구 여러 나라의 선진 교육과 문물을 두루 시찰하신 뒤에 귀국하여 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습니다. 오늘의 고려대학교로 발전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선생은 오늘의 대학 총장격인 교장을 맡아 유능한 교수들이 상아탑 안에서 학문에 매진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성장할 인재를 양성하도록 성의껏 뒷받침하였습니다. 선생은 민족 사학의 기틀을 다지고 북돋아 오늘날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고려대학교라는 세계에 자랑하는 학문의 전당을 육성하였습니다. 독립국가였다면 정부가 수행했을 역할을 선생이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고려대학교가 배출한 인재와 학문적 업적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고, 가꾼 주역들을 양성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1920년에 창간한 동아일보는 총독부의 탄압을 견디면서 삭제, 압수, 정간, 그리고 언론인의 투옥 등 사법처분의 가시밭길을 헤쳐왔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했던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운 사건은 언론의 가장 상징적인 항일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총독부는 마침내 1940년에는 동아일보에 폐간이라는 숨통을 끊는 최후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선생께서는 기업가로서도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1917년에 경성직유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를 인수하여 2년 뒤 1919년 10월에는 경성방직주식회사로 명칭을 바꾸면서 민족 기업의 육성에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교육과 산업분야를 병행하여 식민지 치하 조선의 경제발전에도 힘을 쏟은 것입니다. 민족자주를 위한 여러 운동도 선생이 중심인물이 되어 막후에서나 또는 전면에 나서야 활성화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923년 우리가 만든 국산제품을 애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도 선생의 참여로 추진되었던 캠페인이었습니다. 1921년에는 민립대학 설립기성회를 설립하여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대학 설립에 성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 사업에 헌신하면서 저항했던 사람들은 무장 투쟁과는 다른 방법으로 항일의 길을 걸었습니다. 교육과 문화운동이라는 장기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독립을 쟁취하고 독립 이후의 국가건설에 대비하겠다는 현실적인 방안을 택한 것입니다.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실력을 기르는 일은 민족의 먼 장래를 기약하는 실질적인 방책이었습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생존과 항일을 병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제 치하의 고통 속에 살면서 언론과 교육을 통한 애국의 길을 걸었던 선생의 공적을 폄훼하고 큰 업적의 그늘에 있는 작은 흠집을 끄집어내어 확대하고 비방하는 풍조가 있는 현실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다시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선생의 업적이 널리 재조명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