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시학관(視學官)이 오면 알려라

보성전문학교 교장 시절의 인촌 김성수 보성전문학교 교장 시절의 인촌 김성수

당시에는 모두가 일본어로 강의를 해야만 했는데 유독 보성전문에만 일본말을 모르는 교수가 여러 명 있어서 우리말로 강의를 했다. 일본인 시학관이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감시를 하는데 우리말 강의를 계속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仁村은 정문 수위에게 항상 망을 잘 보도록 하게 하고 시학관이 나타날 때는 교수들이 알아서 처리하라 했다.

일본어를 모르는 대표적인 교수는 영어의 백상규와 철학교수 안호상이었다. 시학관이 나타났다는 기별만 받으면 백상규는 지금까지 우리말로 강의하다가 영어회화 시간으로 재빨리 변경하여 영어로 강의하여 위기를 넘기는 것이었다. 안호상 또한 처지는 비슷했다.

일본어 대신 독일어 강의

삼포라는 일본국사 가르치는 못된 선생이 있었는데 仁村 선생도 그자가 스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仁村 선생은 왜놈들이 제일 노리는 것은 좌익교수가 아니라 안선생 같은 사람이라고 하시며 주의를 주시곤 했다. 그때 仁村 선생이 이사장 하실 때인데 나는 여름에도 강의실 문을 닫고 강의를 했다. 仁村 선생은 오뉴월에 왜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러느냐며 웃었다.

"제 강의는 문을 닫아야 그 진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열면 그 진수가 다 나가버리는 거로구먼? 알겠네. 나도 복중에 문 닫은 방에서 강의를 듣고 버텨보지. 저네들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그 인내심 시합이나 해보세"

그러시면서 가끔 강의가 끝날 때까지 옆에 앉아 계셨다. 내가 일본 말을 한 마디도 모른다는데 仁村 선생의 걱정이 제일 컸다.

"염려 마십시요. 그자가 계단만 올라오면 그때부턴 독일 말로 강의를 하겠습니다. 독일 말이야 자신 있죠. 한탕 떠들면 시학관 놈이 뭘 알겠습니까? 그냥 가겠지요."

나는 학생들과 짜고서 시학관만 오면 유창한 독일어로 강의를 했고 학생들은 무슨 말인 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학관도 중뿔도 모르면서 알아 듣기나 하는 것처럼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는 나가버렸다. 웃기는 일은 강평회에서 시학관이 칭찬을 했다 하여 仁村 선생은 내 손을 잡고 한동안 웃으시는 것이었다. (安浩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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