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겨레의 기업 그 본보기

초창기 경방에서 생산한 ‘태극성’표 국산 광목 초창기 경방에서 생산한 ‘태극성’표 국산 광목

仁村은 경성직뉴를 경영하면서 좀 더 큰 규모의 시설을 갖춘 새 회사를 설립해야 겠다는 의욕이 일어났다. 그것은 일본 제품에 맞서기 위한 불가피한 대항 조치이기도 했다.

仁村은 경성방직회사를 설립하면서 주식회사제를 도입했다. 仁村 자신의 자본만으로도 회사설립이 가능했는데도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경방주식을 모집했다. <일인일주>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당시 한 주의 주식가는 5십원이었다.

조기춘의 평가

산업이라는 것이 얼른 보면 돈벌이라고 생각되나 仁村선생이 <경방> 한 것을 보면 민족의 사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17년 경성 직뉴를 인수하고 1919년에 경방을 창립했는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주를 모집했다. 전국의 지주 유지들을 찾아다니면서 이건 독립운동 하는 거다. 그러니 독립운동 자금으로 생각하고 돈을 내라고 했다 한다. 그래서 창립 당시 발기인들의 인수주식은 3천7백90주, 나머지 1만6천2백십주는 일반 공모주였다고 한다. 그런 점만 보더라도 仁村은 경방을 민족의 기업으로 생각한 거라고 보여진다. 그전에도 많은 민족 산업들이 있었으나 대개 금융기관, 토지회사 등이었는데 이 분은 제조업으로써 우리 손으로 우리 물건을 만들자고 한 것이다.

경방의 설립 취지문에 보면 우리 민족에게 직업을 준다. 그리고 민족기술자를 양성, 축적한다. 우리 옷은 우리 손으로라는 대목이 보인다. 더구나 당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은 주식회사를 할 만한 능력도 없고 지식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仁村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개기업인 주식회사를 시범하여 성공해 보여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경성방직을 건설한 것은 단순한 기업적인 면뿐 아니라 민족의 사업이란 점에서 위대하게 평가한다.

仁村이 경방을 설립하게 된 목적과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견해라 할 수 있다.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키 위해 仁村은 설립허가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나 그들은 당장 허가를 내주지 않고 질질 끌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방직회사 건설로 그때까지 폭리를 취해 오던 일본 방직회사가 조선내의 시장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구나 1917년 그 해에는 일본의 <미쓰이>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총독부가 마침내 허가를 내준 것은 仁村의 경방을 과소평가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공업이란 원시적인 단계에 있다. 공장다운 공장이 어디 있으며 공장을 경영해 본 경험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그리고 기술자도 없다. 그런 자들이 방직공장을 하겠다구! 흉내 정도나 내다가 제풀에 문을 닫게 되겠지. 거기다가 주식회사? 주식회사란 말은 들어본 모양이군. 도대체 사업체가 있었어야 주식이 뭔지를 알지? 안 해본 회사를 꾸며 보겠다는 데야 결말이 뻔하지 않는가? 돈만 날리고 문을 닫겠지."

이런 평가에 따라 허가를 해 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仁村은 전국 각처의 지주와 유지들을 가가호호 심방하면서 주식을 사라 할 때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주식이란 개념조차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주식을 사준 지방유지들은 주식을 삼으로 해서 이윤을 얻는다는 생각보다는 仁村의 명성과 인격만 믿고 독립운동 자금을 희사하는 마음으로 샀다고 한다. 仁村이 발이 부르트도록 각처를 돌아다니는 것을 본 측근은 이해를 못하고 무슨 고생을 그렇게 사서 하느냐고 했다.

"모르는 소리. 산업을 진흥시키고 상업을 발달시키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모든 이들이 알고 깨우쳐야 허네. 주식회사가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날뛴다고 총독부 사람들은 우릴 멸시했어. 나도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야.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고. 주식이 뭔지 주주가 뭔지 회사가 뭔지 계몽을 해야 해. 내가 못하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해야 헐 일일세. 두고 보라구! 50원짜리 주식하나 산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 우리 공장에서 광목이 생산되어 나오면, 그분들이 전국 각처에 있으면서 뭐라고 하겠나? 경방은 내 회사니 내 회사 제품을 사라고 하겠지? 아니 우리 옷은 우리 힘으로 짠 옷감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국산품 애용을 부르짖겠지? 경방의 앞날은 밝아요!"

仁村의 선견지명은 실로 놀라 왔다. 그의 예상은 적중하여 경방은 민족의 기업체로 뿌리를 내려 모든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 시절에 仁村이 경방의 기업을 공개하며 이른바 공개기업으로 회사를 경영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재벌들에게 어떤 귀감이 아닐까 여겨지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仁村은 언제나 한 발 앞서가는 민족의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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