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

경성방직주식회사 직공들의 일제강점기 때 작업 모습. 경성방직주식회사 직공들의 일제강점기 때 작업 모습.

1917년 仁村이 중앙학교 교장이 된 다음 새 교사를 지어 계동으로 이사를 할 때쯤 교사 충원 계획으로 여러 교사를 초빙했는데 그 가운데는 물리 교사인 이강현이 있었다. 그는 서울태생으로 仁村보다 세 살이 위였다. 仁村이 그를 알게 된 것은 동경 유학시절이었다. 당시 이강현은 동경공업고등학교에서 방직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당시 유학생들은 문과를 전공하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공업학교에서 그것도 방직을 전공하는 이강현은 특이한 존재였다.

학교 졸업 후 이강현은 귀국하여 1910년 경부터 경성상업회의소에서 발행하던 <상공월보>등에 매월 <염색론>, <공업과 원동력>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초창기 우리나라의 기업가를 위한 상공지식, 기술 등을 보급 계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仁村이 중앙학교를 인수하게 되어 그는 교사로 초빙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민족의 실력배양은 경제력 향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항상 산업입국의 꿈을 가지고 있던 仁村은 시간날 때마다 그와 담소하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강현이 말했다.

"학생들에 옷에 대한 불평이 많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국산품을 이용하기 위해 무명으로 교복을 해 입으시라는 것까지는 십분 이해하지만 손질이 많이 가는 데다가 불편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불편한 점이라? 그건 나도 알고 있소"

仁村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학교 교복은 일제 광목을 쓰지 말고 재래의 무명베를 사용하여 입으라 한 것은 仁村 자신이었다. 일본 것이 싫기도 했을 뿐 아니라 조선학생은 조선 옷감으로 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우겼었다.

그러나 입고 다니는 학생들은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투박하고 맵시가 없어 외관상 촌스러운건 차치하고라도 광목보다 질기지 못해 항상 무릎과 팔꿈치가 나오고 한 번만 딩굴면 해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한 번 빨려면 잔손질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상품인 광목으로 해 입으라 할 수는 없지 않소?"

"우리도 우리 손으로 광목을 만들면 됩니다. 공장만 세우면 일본 상품보다 훨씬 질 좋은 옷감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기술이 없지 않소?"

"그건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방직기술은 저에게 있습니다. 기능을 살릴 수 있는 직공도 있습니다."

"그런 직공이 어디 있단 말이요?"

"가내공업 규모이기는 하지만 서울 장안에도 몇 개의 직조 공장이 있고 거기서 일하던 직공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르치면 금방 기술을 익힐 수 있습니다."

"그래요?"

仁村은 은근히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평소에도 仁村은 일본의 자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장악해 가고 있다는 것을 중시하고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기업을 일으켜 쓰러져 가는 조국의 경제를 부흥시켜 일제와 맞서 이겨야 하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 仁村이었기에 이강현의 말을 듣자 당당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선생. 그동안 우리나라의 방직산업 현황이 어떠하며 그 사업의 전망 등에 관해서 소상하게 조사해줄 수 없겠소?"

"알아 보겠습니다."

얼마 후 이강현은 자료를 가지고 상세하게 보고를 했다.

"우리나라는 1897년, 당시 친일파 대신으로 지목 받고 있던 안형수씨가 대한직조 공장을 설립한 것이 방직공장의 효시였지만 대한직조는 설립만 되었지 생산도 못한 채 문을 닫았고 이태 후인 1889년에 민병석씨를 사장으로 하는 종로직조사라는 방직공장이 생겨 하루 7십 여필의 광목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적 체제를 갖추고 출발한 방직공장은 역시 8년 전에 문을 연 김덕창씨의 직조공장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강현은 그 동안 개화의 물결을 타고 소규모 공장을 연방직공업계의 개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종합평가를 내렸다.

"의생활 자료를 우리는 수동식 베틀에서 생산하여 수천년 동안 사용하여 왔으나 개화 이후 서구로부터 산업혁명의 산물인 직조기계의 발달로 대량생산 된 직조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곧 이어서 일본의 직조물이 들어 왔는데, 지금은 일본이 우리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조선 사람들도 직조공장 등을 세웠으나 모두 영세를 면치 못했고 도산지경에 이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서구식 기계를 도입하여 새로운 근대적 기술방식으로 방직공장이 건설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직조 원단의 가격이나 질면에서 일본제품과 겨루어 손색이 없다면 우리나라 소비자도 국산품을 쓰려고 할 것입니다."

仁村은 이강현의 시장조사와 전망, 그리고 공장 건설의 규모 등 상세한 조사보고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직물류의 자급자족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더 이상 일제의 경제수탈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仁村이 방직업에 진출하려 했을 때는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여러 군소 공장이 많았다. 1917년 仁村은 마침내 광희문에 있던 경성직뉴회사를 인수 경영하기로 했다.

이러한 경성직뉴 회사를 인수하라고 권한 사람은 이강현이었다. 이리하여 仁村은 교육사업에 이어 또 하나의 구국운동인 산업전선에 나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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