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고려대학교의 탄생

해방 후 고대 본관 앞에 선 인촌 해방 후 고대 본관 앞에 선 인촌

일제말 교명까지 경성척식 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바뀌어야 했던 보성전문이 다시 본래의 이름을 찾은 것은 해방과 더불어 였고 개학식을 가진 것은 10월5일이었다.

광복 후 첫 교수회의가 열리던 날 仁村은 <보전>캠퍼스에 나오며 일제치하의 그 암담했던 먹구름이 걷힌 민족의 교정을 바라보며 감개가 무량했다.

이런 때 멋 안 내고 언제 멋내나

해방 후 처음으로 <보전>교수회의가 열리던 날이었다. 밤색 싱글을 멋지게 차려 입고 흰 손수건까지 새끼 호주머니에 찌르신 모습으로 仁村 선생이 나타났다.

"웬 일이십니까?"
"다시 찾은 나라에서 교수회의를 하는데 이럴 때 멋 안 내고 언제 멋을 내겠는가?"
하시며 빙그레 웃으셨다.

해방되고 물자가 부족하여 점심은 대개 거르던 때였다.

"이봐, 점심 안가지고 왔지?'
교수회의가 끝나자 나에게 그렇게 소근거리셨다.

"예"
"나하고 나눠 먹자고?"
그러시더니 양복 주머니 속에서 찐 고구마 두 개를 꺼내셨다. 밤색 싱글에 고구마라니. 하지만 선생님은 즐겁게 들자고 하셨다. (金樟洙)

보전 인수 전부터 仁村의 꿈은 이 땅에 민립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대학을 창립할 준비를 서둘렀다. 이사회를 열어 보성전문 재단의 해산을 결의하고 그 재산을 중앙학원에 인계한 다음 군정청에 고려대학교 설립 허가신청을 했다. 군정청은 이윽고 1946년8월15일자로 설립허가를 내주었다. 보전 관계자들은 새 대학의 명칭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대해 의논을 했었다. 여러 가지 이름이 나왔으나, 고려대학교로 정한 것은 仁村 스스로 명명한 것이었다.

활달한 기상과 불패의 정신

보성.조선.고려 등 세 대의 명칭을 가지고 논하되 보성은 전문학교 때의 이름이니 대학이 되면 갈아야 하고, 조선은 개국 당초부터 끝까지 국토 내에서만 우물쭈물 하였고 세력이 밖에까지 미쳐보지 못했으나, 고구려는 한때 요동에까지 세력이 팽창하였던 것이니 그 웅대 활달한 기상과 자주 불패의 정신이 취할 만하나, 다만 삼자명은 불편하니 <句>자를 약하여 <고려>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李殷相 ; <아 仁村은 가시다> <新生公論>1955.6)

이렇게 되어 고려대학교는 탄생되었고, 초대 총장에 기당 현상윤을 임명, 새로운 명문대학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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