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머슴교장

1934년 인촌이 보성전문학교 본관 신축공사장을 둘러보고 있다 1934년 인촌이 보성전문학교 본관 신축공사장을 둘러보고 있다

仁村은 보전 본관과 도서관이 들어선 다음부터 언제나 학교 뜰에서 사는 날이 많아 <머슴 교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구미 각국의 대학 캠퍼스가 모두 수목이 울창하고 너른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있어 학생들의 정서생활에 보금자리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스스로 발 벗고 나서서 뜰을 가꾸고 나무를 심었다.

오늘날의 고려대학교 구내에 서 있는 오래 된 나무들치고 仁村의 땀과 손길이 배이지 않은 것이 없다.

아름드리 나무들은 홍릉 임업시험장이나 계동의 자기 소유 식수원에서 모두 옮겨다 심은 것이며, 쓸 만한 나무면 자택 정원에 있는 나무까지도 학교로 옮겨다 심을 정도여서 부인의 핀잔도 여러 번 받았다고 한다. 잔디 또한 영국이나 일본에서 종자를 구해다가 뿌려서 가꾸었고, 정읍. 고창 등지의 재래종 잔디도 떠다가 옮겨 심었다. 그러고는 틈 날 때마다 잔디 밭에 앉아서 잡초를 솎아내는 것이었다.

李重載 회고

보전에 들어가려고 친구 들과 원서를 받으러 갔더니 허름한 영감이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원서를 가지고 나오다 보니 잔디밭이 좋길래 들어가 앉아서 노닥거렸다. 그랬더니 그 영감이 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해서 나왔다. 그 후 보전 입학식에서 훈시하는 교장선생님을 보니 바로 그 영감님이었다.

鄭成太 회고

나는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5년간 운동선수로 취직하고 있다가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 보성전문 법과에 들어갔다. 그때 운동장을 삥 둘러 나무가 서 있었는데 무척 좋았다. 큰 운동장을 돌아서 교실에 들어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가운데로 질러가기를 좋아해 나무들이 자빠졌다. 그럴 때면 시골 영감 같은 분이 한복을 입고 자빠진 나무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손질을 했다. 버려진 휴지, 쓰레기들을 줍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仁村 선생이었다. 나는 지금도 고대에 가면 그 모습이 선연하게 보인다.

이는 비단 정성태만의 회고가 아니다. 당시 보전을 다닌 백남억. 김성곤 등과 모든 학생들이 똑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음을 보면 仁村은 얼마나 부지런하고 소탈했는지 알 만하다. 仁村은 보전에 가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집에 돌아오면 집 근처에 있는 중앙고보에도 늘 둘러보고 잡초를 뽑거나 휴지를 줍거나 일요일 같은 때면 직접 거름통을 메고 나무에 거름을 내는 일도 예사로 했다고 한다. 밤에도 가끔 학교 안을 살피며 문단속도 하고 갈 만큼 자상한 성격이었다.

韓萬年 회고

선친께서 중앙학교를 나오셨다.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봄에 우리는 <중앙학교>교내로 이사를 가 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면 한복을 입은 허술한 아저씨가 나와 운동장도 쓸고 잔디도 깎고 했다. 학교 수위 같았다. 그 해 여름이었는데 이사간 지도 얼마 안 되고 어린 데다가 친구도 없어서 저녁을 먹고 학교 구내에서 놀다가 김기중 선생 동상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누가 와서 깨웠는데 그 분은 바로 잔디 깎는 수위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 어른은 꾸중을 안 하시고 찬 데다 뺨을 대고 자면 입이 비뚤어지는 법이다. 이런데서 자지 말고 집에 가서 자라고 타이르셨다. 그래서 어찌나 황송하고 미안했던지 지금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수위가 다름 아닌 仁村 선생이었다.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