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古下와의 만남

1925년경 동경에서 송진우(왼쪽)와 김성수 1925년경 동경에서 송진우(왼쪽)와 김성수

순치보거지간(脣齒輔車之間)이란 말이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있을 수 없고 이빨이 없으면 입술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니, 없어서는 안될 바늘과 실의 관계를 갖는 것을 말함이다.

仁村이 순치의 교의를 맺은 채 평생동안 같은 뜻을 가지고 동반을 하게 된 지기, 古下 송진우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열 여섯살 때였다고 한다.

仁村은 장난꾸러기 소년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이르르자 비로소 왜 학문을 해야 하며 인격을 닦아야 하며 나는 무엇이며 나라는 무엇이며 값 있는 인생을 살자면 어떤 뜻을 세워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동학란,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으로 나라 안은 혼란의 와중에 휩쓸려 있었고 국운은 점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라는 참신하고 유능한 새로운 지도자와 새로운 인재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자면 물밀듯이 들어오는 서양의 신학문을 알아야만 했다.

원파공은 仁村을 나라가 원하는 영재로 만들기 위해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좀더 학교다운 학교로 보내고 싶었다. 당시 원파공은 동복군수로 재임 중이었고, 지산공은 진산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향리에 돌아와 있었다.

仁村은 부모슬하를 떠나 청운의 뜻을 품고 전남 창평에 있던 창흥의숙으로 가게 되었다. 창흥의숙은 仁村의 장인 되는 고정주공이 세운 학교엿다. 고정주는 仁村의 두 선친과 함께 호남에서는 몇 안 되는 선각자 중의 한 분이었다. 일찍이 그는 환로에 나가 규장각 직각이란 벼슬을 하고 있다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잡는 길은 인재 양성이 최선이란 신념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호남학회를 발기하고 창흥의숙을 설립하여 향리의 젊은이들에게 한문 국사 영어 일어 산술 등 신학문을 배우게 하고 있었다.

仁村이 공부를 하기 위해 창평의 처가에 오자 고정주는 아들 광준과 사위 仁村을 위해 창평읍 월동에 특별히 <영학숙>을 열게 했다. 강사도 따로 서울에서 유능한 영어교사를 초빙하여 공부에 열중토록 해 주었다. 고정주공이 큰아들과 그보다 몇 살 아래인 사위 仁村을 위해 특별배려를 한 데는 그만큼 아들과 사위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고, 그만큼 나라의 사정이 급박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해, 그러니까 1905년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해였다. 고정주로서는 아들과 사위가 국내에서 영어를 속성으로 배운 후 상해나 동경으로 나가야만 본격적인 신학문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그만한 식견과 경륜을 가진 지사도 드물었다. 仁村은 부모도 잘 만났지만 장인 역시 잘 만나 그때로 보면 행운아였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仁村은 손위 처남인 광준과 함께 <영학숙>에 기거하며 면학에 열중했다. 그렇게 두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어깨가 딱 바라지고 훤출하게 키가 큰 청년 하나가 괴나리 봇짐을 메고 <영학숙>을 찾아왔다. 새로 함께 공부하게 될 학생이라는데 쭉 째진 눈하며, 꾹 다문 입술, 약간 불거진 광대뼈 등 일견 보아도 불의와는 타협할줄 모르는 성깔이 보였고 무뚝뚝하여 붙임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청년이었다. 말도 없고 아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仁村보다는 한 살이 위인 열 일곱살이라는데 어른처럼 의젓해 보였다. 이 심각한 표정의 키 큰 청년은 고향이 이곳 창평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남 담양군 고지면 손곡리라는데 그의 부친이 仁村의 장인인 고정주와 친교가 두터워 영학숙이 열리자 공부를 시키려고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 키 큰 청년은 함께 공부를 하면서도 별로 말이 없었고, 속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仁村이 친구로 지내자고 했으나 그는 아무 하고나 간담을 상조하는 그런 줏대 없는 사내는 아니라며 일축하는 것이었다. 일건 거만해 보였지만 심지가 깊은 청년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두 사람은 서로의 속 마음을 여는 친구 사이로 변했다. 이 청년이 仁村의 평생지기가 된 古下 송진우 였다. 근대사의 격동기를 손을 맞잡고 헤쳐 나가게 된 두 사람의 거인은 그렇게 만나게 됐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성격이나 생활태도가 서로 대조적이었다. 仁村은 착실한 학구파였고 성실한 현실주의자였으나. 古下는 공부보다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의 정을 토로하는데 급했고 이상주의자였으며 비분강개파였다. 그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사설 같은 것을 오려가지고 있었는데 을사조약을 통박한 <시일야 방성대곡>같은 글을 읽고 또 읽으며 눈물을 머금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仁村은 비분강개도 중요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실력을 쌓기 위해 착실히 공부할 때라며 그의 비분을 위로했다. 때로는 그것이 언쟁의 씨앗이 되어 고성이 오가도록 다투기도 했지만 지나가면 당장 씻은 듯이 잊고 다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한 세 사람의 창평생활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창평에 온 지 반년이 못되어 古下는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이곳은 아무래도 우물 속이다. 난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떠난 이유였다. 함께 있을 때는 몰랐지만 古下가 떠나버리고 나자 仁村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기만 했고, 자기도 이제는 좀더 넓은 곳에 나가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 해 초겨울 仁村도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인촌리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친 기중공 역시 국운이 날로 기우는 것을 보고는 벼슬에 뜻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창평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부친은 돌아온 아들을 사랑에 불러 앉혀 놓고 그렇게 물었다.

"예. 공부도 했습니다만 귀한 친구를 얻었습니다."

"귀한 친구? 예로부터 그 사람을 알려면 사귀는 친구를 보면 알수 있다고 했느니. 그래! 그게 누구냐?" "예. 송진우라고 하는 친구입니다. 담양 손곡리 출신인데 그 기개와 포부가 대단하여 시골에 묻히기에는 아까운 인재였습니다."

"어떤 집안의 자재인고?"

"대소 일가 오대(5代)가 함께 사는 담양의 송시 집안 아들인데 부친은 벼슬은 안 했지만 선비인 듯하고 그 친구는 숙부한테서 한학의 기초를 배우고 기삼연이란 분 밑에서 글을 배웠다고 합니다."

"기삼연? 혹시 그 분이 성리학자 기정진의 집안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습니다. 친척 집안이라 합니다. 그의 기개는 바로 스승 기삼연공의 영향을 이어 받은 듯이 보였습 니다."

"알만하다. 그래 공부는 많이 했느냐?"

"열심히 했습니다. 한양에서 모셔온 이표 스승님은 영어에도 능통할 뿐만 아니라 한학에도 조예가 깊으시어 신구학문을 다 가르치는 분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겠구나. 그보다 그렇게 좋은 친구를 얻게 되었다니 다행한 일이다."

아들의 말을 들은 부친은 이제는 아들이 큰 뜻을 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내심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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