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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신태수 윤택중 선생의 1964년 원고

2019년 봄, 류희춘 선생(고려대 62학번)이 인촌 김성수 선생에 관한 오래된 원고 묶음 3편을 인촌기념회에 전달했다. 하나는 김형석 (1920~ ) 연세대 명예교수의 원고이고 또 하나는 건국대 재단이사장을 지낸 신태수(1896~1988) 선생의 글, 그리고 제9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윤택중 (1913~2002) 선생과의 대담 원고이다. 1963~1964년 무렵 류 선생이 재경고창학우회장을 맡았던 시절 청탁하거나 직접 작성한 원고 3편을 옮겨 소개한다.

고창인(高敞人)을 말한다

申泰洙 (建國大學園 명예이사장)

고창은 필자가 청춘기의 온갖 성(誠)과 열(熱)을 기울여 임염(荏苒) 18년에 걸쳐 교육사업에 헌신한 곳이다. 이번 재경학우회의 요청으로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고창의 인물에 대하여 추억과 더불어 몇 줄 적어 보기로 한다.

1. 역사와 환경

고창은 백제의 사반주(沙伴州) 4현(縣)의 하나인 무할(無割)현 모량부(牟良夫)리라 칭하였는데 신라 경덕왕때 고창으로 고쳐서 무령(武灵, 灵光)군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고부(古阜)군과 통합하였고 그후에 상질(尙質, 興德) 감무(監務)가 겸집(兼輯)하던중 이조 태종원년(서기 1401년) 2현에 모두 전임 감무를 두게 되었다.

이조말 전라도를 남북으로 분할할 때 일시 남도에 속하였으나 광무10년(서기 1906년) 전북으로 이속하여 전주부(府)의 관할하에 있었고 융희(隆熙)후 계축(癸丑, 서기 1913년)에 무장(茂長)군 일원과 흥덕(興德)군 일원이 내합(來合)하여 오늘날 고창은 호남의 대군(大郡)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창은 전북 남단에 위치하여 동남방의 방장산(方丈山)을 주봉으로 하는 노령산맥이 가로놓였고 서쪽은 황해에 면하였으며 노령 연봉의 정기는 인물의 배출을 상징하는 듯 하다. 구릉지대가 많아 삼림이 무성하고 평야부는 토지가 비옥하여 농산물이 풍부할 뿐 아니라 해안선을 따라 여러 가지 수산물이 산출되는 좋은 입지조건하에 있다. 군하(郡下) 명승고적의 으뜸은 선운사를 들 수 있는데 1400년전 창건으로 경내 도솔산(兜率山) 일대는 준험유수(峻嶮幽邃)한 곳으로 만월대(滿月臺) 영암(靈岩) 선학암(仙鶴岩) 봉두암(鳳頭庵) 용문암(龍門岩) 등의 기암괴석과 절벽 동굴이 있어 풍경이 절가(絶佳)하다.

그 밖에도 해수욕장 모양성지(牟陽城址) 문수사(文殊寺) 등의 풍치지구가 있다.

또한 고창은 충신과 효자 절부(節婦)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임진란에 수훈을 세운 오희길(吳希吉) 유동립(柳東立) 유한민(劉漢民) 유철견(柳鐵堅) 갑자 괄란(适亂)에 유공한 송문휘(宋文徽) 조흡(曺潝) 홍산해(洪山海) 개국공신 옥천부원군 증영의정 유창(劉敞) 씨가 난 곳이다.

친병(親病)에 단지성혈(斷指誠血)한 유동신(柳東信)을 위시하여 모질(母疾)시 의언(醫言)이 인육가제(人肉可劑)라 하여 자할복이진(自割腹以進)한 홍산해(洪山海)라든지 병모(病母)를 화중(火中)에서 배화부출(排火負出)한 신괄길(申适吉)의 딸이라든지 출천지효(出天之孝) 무장인(茂長人) 진사 김질(金質)이나 김기서(金麒瑞) 변성진(卞成振) 유만령(柳萬齡) 김경철(金景哲) 오연(吳淵) 김여강(金汝剛) 김세창(金世昌) 등 효자 열녀가 허다하다.

2. 혁명적 기개

고창인은 일반적으로 혁명적 기개가 뚜렷하다. 우리나라 근세사에 있어서 가장 혁명적인 거사는 동학난이라 할 것인바 이 동학난이 일어난 곳은 고부땅(往時는 고창의 일부)이지만 무장을 비롯한 고창군민 다수가 참획(參劃)한 혁명운동이었다.

이조말엽에 이르러 정치의 부패 탐관오리의 발호 세금의 과중 등으로 농민은 심한 고통을 받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외국세력이 국내에 침투하여 사회적 정치적으로 수습할 방도조차 묘연(杳然)한 가운데 패망의 날만 기다리게 되자 이 부패한 사회를 개혁 소생시켜 보자는 사회의식의 행동화가 동학난이다. 봉기의 직접 원인은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만석보(萬石洑)의 수세과중 불효 불목세 상피죄 대동미 건비(建碑) 등으로 부당한 세금을 약탈 착복한 데서부터 일어나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분격한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하고 관고(官庫)를 열어 빈민에 전곡물(錢穀物)을 분배하였는데 이와 동시에 고창(무장)인 손화중(孫華仲)은 무장을 근거로 하여 수천 농민을 거느리고 태인(泰仁) 부안(扶安) 등지까지 순회하며 오리(汚吏)를 숙청하고 관헌 토호의 탐학(貪虐)에 희생된 백성의 재산을 탈환하는 등 봉기의 선두에서 활약한 것이 다름아닌 고창군민들이었다.

고창인 손화중은 동학군 3걸(傑)의 하나이며 비정악폐(秕政惡弊)의 지방관리들을 소탕함은 물론 전주를 점령하고 중앙정부를 공격하는 등 기세를 올릴때 가장 지모용맹이 뛰어난 분이 손화중이라고 알려졌으며 고창군민들이 다수 동학군에 호응가담하였다. 동학군이 현대적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하였지만 우리나라 민중운동사상 일대 선구를 이룬 동시 미온적이며 무신경한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고 신시대로 향하는 경종이 되게 하였다는 점에서 고창군민의 혁명적 기개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필자가 접한 많은 고창 인사들에게서는 이런 기상을 엿볼수 있었다.

3. 정치적 역량

고창인은 우리나라의 가장 특출한 정치인들을 배출하였다.

우리나라 정치가의 대다수는 해외 망명중에 민족운동을 하였지만 국내에서 민족을 사랑하고 꾸준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제일인자가 인촌 김성수 선생임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인촌 선생이 부안면(富安面) 인촌리에서 출생하였으니 고창은 가장 훌륭한 정치가의 한 분을 낸 고장이다.

김성수 선생은 다방면으로 숙달하여 교육가로서 중앙학교 고려대학교 등을 경영하였고 사업가로서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민족의 경제자립에 용력하였으며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대일항쟁의 선봉에 섰던 분이다. 해방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그 당수로서 활약하였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으로서 또는 부통령으로서 항상 민족의 선두에 서서 활동하셨다. 연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증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 필자와도 교분이 두텁던 백관수 선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백관수 선생은 성내면(星內面)에서 출생한 분으로 3.1운동의 선구가 되는 2.8선언의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1918년 세계 제1차대전이 종막을 고하고 그 익년 봄에는 불란서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 등 14개 조항의 원칙을 발표하자 세계의 약소민족은 크게 고무되어 우리나라도 일제의 패반(覇絆)을 벗어나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불소(不少)한 우리나라 유학생이 있었는데 이들은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조국광복의 꿈을 실현하려는 동지 규합에 진력하게 되었고 유학생회 주최로 웅변대회를 여는 등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독립을 얻기 위해서는 일제의 노예가 될 것을 결사반대하는 거족적 운동을 일으키되 유학생이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는 각오하에 백관수 선생을 비롯한 11인의 독립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날인 하였는데 여기에는 김도연(金度演) 최팔용(崔八鏞) 나용균(羅容均) 이광수(李光洙)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운동의 근거지는 다름아닌 백관수 선생 숙소였고 여기에서 독립선언서를 일주일간에 걸쳐 불철주야로 등사하였다 한다. 1919년 2월18일 동경 신전구(神田區)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학우회총회라는 명목하에 남녀학생이 운집한 가운데 대회가 시작되자 영웅적 투사인 백관수 선생이 등단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만세와 환호성이 적도(敵都) 동경을 진동시켰다.

2.8운동이 3.1운동의 전초적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통치국 수도 중심부에서 독립을 선언한 그 용기와 선언문의 제일성을 발한 백관수 선생의 기개야말로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이 일 때문에 옥고도 겪으셨다. 선생의 많은 일화가 있거니와 왜정시대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을 때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르러 총독부정책으로 동아일보 폐간을 강요하자 선생께서는 내 손으로는 폐간서류에 도장을 찍을 수 없다고 거부하신 일 등이 선생의 성품을 나타내는 일면이라고 하겠다. 해방후에는 정계에서 혼란한 정계를 수습하기에 전력을 기울이셨는데 동향인 인촌 선생과 한국민주당을 창건하는 주동적 역할을 하시고 국회의원에 당선 정치활동의 성숙기에 들어갔을 때 6.25사변이 발발하여 불행하게도 북한에 납치되어 지금 그 생사조차 묘연하거니와 백관수 선생은 고창이 낳은 인물의 거성이시다.

그 밖에도 정치적으로 활약하던 인사가 불소하지만 두어분만 말하여도 고창인의 정치적 역량을 규지(窺知)할 수 있을줄 안다.

4. 교육열

고창인을 말하자면 필자와도 밀접한 인연이 있는 고창고등보통학교 설립에 보여준 교육열과 희생적 정신이라 하겠다.

피압박 민족의 울분과 설움에서 폭발한 3.1운동의 함성이 삼천리 방방곡곡을 뒤흔들자 이에 자극을 받은 고창군민은 우선 배워야 민족의 살 길이 열린다는 각성하에 고창군민 중에서 5500명이나 열의 있는 기부행위로 호남 유일의 사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유례가 희소하며 특히 교육방침이 애국적 입장에서 민족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한 전국의 학생들이 다수 부급(負芨) 내교(來校)하였고 또 이들을 우선 편입시키는 도량을 지닌 교육기관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전국에는 고창 출신의 쟁쟁한 인사들이 배출되어 사회의 중진을 이루고 있거니와 고창인의 애국심과 교육열의 결정으로서 고창고보가 이룩되었다는 것은 비단 고창군민의 자랑일 뿐 아니라 민족의 자랑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평교원에서 교감 교장에 이르기까지 일관 봉직한 학교를 운위함은 자화자찬격이 될지 모르나 왜정시에도 학교운영면에 있어서나 사무체계상으로나 가장 모범적이고 학생의 질이 우수하였던 것은 사실이며 오늘날의 고창중고등학교는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줄 확신하는 바이다.

서상(敍上)은 추상적으로 생각나는 바를 적어 보았다.

물론 현재 활약 있는 유능한 인사가 허다한 것을 알고 있지만 이분들 개개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약(略)하고 고창인의 혈맥속에 흐르는 기개와 대표적인 몇 분에 대해서 약술하는데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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