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hon Kim Sungsoo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제31회-교육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공적]
1947∼1954년 서울 중앙중고교에서 교사와 교감으로 재직했고, 이후 1985년까지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철학을 통해 한국 교육과 문화 발전에 헌신했다. ‘헤겔과 그의 철학’ ‘종교의 철학적 이해’ 등 저술 90여 권을 냈다. 타계한 안병욱 김태길 교수와 함께 ‘3대 철학자이자 수필가’로 불렸고 6·25전쟁으로 상처받은 국민과 젊은이들의 실존적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했다는 평가다. 중앙중고교 시절 설립자인 인촌 선생의 애민정신에 감명 받아 인촌의 교육 헌신을 현장에서 실천했다. 대학에서도 직책을 사양하고 후학 양성과 연구에 전념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앉아 있으면 학생이 되고, 서 있으면 선생님이 된다’는 신념으로 대학 강단을 떠난 뒤에도 사회의 강단에서 왕성한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7)가 잠시 공연, 도서윤리위원을 맡았던 때의 일이다. 당시엔 전두환 대통령과 신군부가 집권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세였다. ‘대통령과 윤리위원들 오찬이 있으니 일주일 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마침 그 시간에 다른 대학에 강의 일정이 있던 김 교수는 “학생들과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어 못 간다”고 했다. 오찬 거절 뒤 윤리위원에서 해임됐다는 전화가 왔다. “잘됐다”는 게 그의 답이었다. 평생을 교육자로 헌신한 김 교수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중앙중고교에서 연세대로 옮기면서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교수다운 교수로 평생을 살자’고 다짐했다. 연세대에서 보직을 맡아 달라는 총장의 요청에도 다른 교수를 그 자리에 추천하면서 자신은 사양했다. “중앙학교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을 5, 6년 동안 가까이 뵈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중 중요한 게 전체를 위해 자신보다 유능한 사람을 밀어주는 것과 편 가르기를 경계하는 것이었어요. 그게 아무나 잘 안 되는데 왜 인촌 선생은 됐느냐, 애국심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그렇고요.”

김 교수가 중앙중고교와 대학에서 길러낸 후학들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 해외 유수 대학에서 학자로 성장했다. 중앙중 시절 제자들은 여든이 넘은이들이 적지 않다. 제자들의 귀가 먼저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사제간의 정이 지금도 돈독하다. 책에 ‘○○군에게’라고 써서 제자에게 선물하면 여전히 어린애처럼 좋아한다는 게 노교수의 말이다.

대학에서 정년퇴직하면서 김 교수는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의 마음으로 사회에서 일하겠다”고 마음먹었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 ‘사회 교육’을 지속하고 있다. 근간 ‘백년을 살아보니’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을 뿐 아니라 올해, 내년, 그리고 한국 나이로 백 살이 되는 후년에도 각각 한권씩 신간을 출간할 예정이다. “제자들이 70대 중반쯤 되니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더군요. 저는 그 나이 때가 삶에서 제일 좋은 성숙기였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수상 소감을 묻자 김 교수는 “조용히 나의 길을 걸었을 뿐 별다른 업적이 없는데, 왜 나에게 상이 돌아왔는지…”라고 말했다. 이내 그는 “6·25전쟁, 4·19, 민주화… 내가 살아온 100년이 우리 민족에게도 참 어려운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사회에 여러 책임을 지고 사느라 고생 많았다고 인촌 선생이 위로해주시는 것 아닌가 싶다”며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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