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hon Kim Sungsoo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제8회-교육부문


김애마선생
김애마박사는 일찍이 1926년이래 이화유치원 사범과 교원을 비롯하여 부속유치원 원장, 이화보육학교 교원 및 학감에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어린이 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체계화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더욱이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자 어린이 교육의 이론체계화와 실천에 더욱 주력하였다. 그는 23년간의 장기간에 걸쳐 <한국어린이 교육협회>의 회장으로서 유치원 및 국민학교 교사의 현직연수에 진력해 온 바 있다.

그의 교육학적 경륜은 이화여자대학교에 한국 최초의 사립 사범대학의 설치를 가능케 하였다. 그는 동 사범대학의 초대학장으로서 유치원, 국민학교 및 중등학교 교사 양성의 길을 개척한 것인데, 사립대학으로서는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도이기도 한것이다. 그후 여러 여성 사립 사범대학의 출현이 있게 되었거니와 유치원, 국민학교 및 중등하교 교사 양성이라는 규모와 시도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점에 있어서 그의 교육학자적 경륜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는 지그도 제자들로부터 "애마 선생님"이라는 애칭으로 흠모되고 있다. 이 애칭에는 스승으로서의 엄함과 사랑을 느끼는 제자들의 추억이 담겨있는 것으로 본다. 실제 많은 졸업생들, 그리고 그의 지도하에 교직생활을 한 교수들의 체험담에서도 한결같이 말하여지는 것이 그의 교육자로서의 고매한 인격력이다. 엄하면서도 자상하니, 교육자로서의 사랑이 도처에 발휘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으로서 재임중 발휘한 탁월한 교육 행정력이 돋보이거니와, 그는 일찍이 두번에 걸쳐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서리로서 교육행정가로서의 탁월성을 보인 바 있다. 더욱이 그가 총장서리로 있었던 때는 해방 직후(1948.9~1949.8)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1948.9~1949.8)였으니 만큼 그의 교육자적 경륜이 이화여대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100주년 기념 특수 공로상과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학교기장>제3호를 수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비단 그의 근무교인 이화여자대학교 발전을 위해서만 일한 것은 아니었다. 보다 폭넓은 여성교육 및 사회교육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것이다. 그는 비단 그의 근무교인 이화여자대학교 발전을 위해서만 일한 것은 아니었다. 보다 폭넓은 여성교육 및 사회교육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것이다. 대한여학사협회 회장을 비롯하여 대한 YMCA연합회 회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위원 및 실행 위원, 그리고 매향여자 중 상업고등학교 재단이사장 등 대외적 육영사업에도 각별한 교육자적 열성을 발휘해 왔던 것이다.


공공봉사부문


언더우드 一家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1885년4월5일26세의 젊은 나이로 내한하여 1915년 10월12일 햐연 57세를 일기로 소천할 때까지 31년이라는 긴 세월, 즉 그의 청춘과 전생애를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그는 한국에 온 첫 장로교 선교사로서 1887년 9월27일 새문안교회를 차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 경신중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오늘날 한국의 사회복지(또는 사회봉사)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또한 한국의 개화운동을 주도해온 민족지도자를 양성하였고, 한국의 문화와 사회발전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었습니다.

그의 선교활동은 물론 갖가지 사회봉사, 교육, 사회활동은 2세에로 연결되어, 언더우드의 집안사람들은 19세기 말의 한국 개화기에서 오늘날의 국제화시대를 맞이하기까지 한 세기가 넘도록 우리민족과 국가의 발전에 불멸의 업적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있습니다.

언더우드목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털여사는 의사로서 한국여성에 대한 의료봉사뿐만 아니라 여성의 개화교육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의 외아들 원한경박사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동란중 1951년 부산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도 그의 부친의 뒤를 이어 연세대학의 학장직을 맡아 교육계에 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방후 해외로부터 귀국하는 피난민들과 한국동란중 수많은 고아와 걸인, 무의무탁한 노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 특히 9.28 서울 수복후 많은 사람들의 한강도강을 도와주는 등 그 당시 그러한 도움없이는 도강이 어려웠을 때 크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949년 공산주의 테러 학생들에 의하여 그의 부인이 피살되는 비운을 안기도 하였으나 결코 한국을 저버리고 떠나지를 아니하였습니다.

원한경박사의 4남1녀들을 모두가 한국땅에서 목회자로 혹은 교육자로 생활하면서 선친들의 유업을 이어 왔고 현재 5세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원한경 박사의 장남 원일한박사는 새문안 교회의 장로로서 그리고 연세대학의 교수로 혹은 이사로 전생애를 그의 선친들과 같이 이땅에서 바쳐오고 있습니다. 그는 부산에 있는 일신병원의 이사로서 또는 USO, Fulbright 한국재단, 한미 우호재단등의 이사로서 봉사해 오고 있습니다.


문학부문


최일남선생
최일남 선생은 약관 21세때인 1953년 데뷔작 <쑥이야기>로 문단에 등단한 이후 10여권의 창작집에 수록된 중단편들과 장편 <거룩한 응달><그리고 흔들리는 배>등 꾸준히 역작을 발표해 왔다.
그는 일제 말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반세기의 우리의 표류하는 역사와 같은시대, 즉 자신의 태어남 이후 현재까지의 생애에 해당되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자기 시대이전을 살지도 않았고 사회의 어떤 특수하거나 예외적인 일과 인물들을 이야기하지도 않았으며 앞으로 오기를 바라는 것들을 위해 역설하지도 않았다. 그는 말하는 이야기와 그리고 있는 인물들은 우리의 소시민 생활에서 숱하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의식과 삶의 모습들이다.

그는 오직 자기가 직접 포착할 수 있었던 사건과 사람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소설 공간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특히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를 직시하며 편중되지 않는 시각과 예리한 비판으로 사회성을 견고하게 갖춘 문학 세계를 구축하는데 진력해 왔다.

그는 그의 정직한 시선으로 한 시대의 일상적인 모습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기가 살아온 시대와 그 시대의 변화들 속에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의식과 양상을 현학적인 수식없이 자신의 관점 위에서 받아들였다. 이와 함께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스민 글을 통해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어루만지고자 노력해 왔다.

그리고 <말의 뜻 사람의 뜻>등 30여권에 이르는 대담집과 수필집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시대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당대의 인물들을 통해 조명해 왔으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소시민들을 각성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최일남선생은 육순에 접어든 이후인 금년 7월에도 권력과 지식인 사회의 관계를 다룬 <하얀 손>을 펴내는 등 전과 다름없이 꼿꼿한 자세로 더욱 정열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평생을 이어온 청빈하고도 고결한 그의 인격은 동료, 후배 문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학술부문


이기영선생
이기영교수는 일찍이 경성제국대학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하고 뒤에 벨기에의 Louvain대학에 유학하여 불교철학을 연구하였다. 귀국하여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래 그는 정력적으로 한국불교의 연구에 전심하였다. 그리하여 총 37권의 저서와 10권의 역서, 그리고 66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이박사가 주요한 연구과제로 삼은 것은 신라의 학승 원효의 사상으로서 그의 저술은 대부분 원효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저술 중에 주요한 학문적 업적으로는 <원효사상>(1967), <한국불교연구>(1982), <원효사상연구 Ⅰ>(1994)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에 <원효사상>은 원효의 <대승기신논>를 바탕으로 원효의 세계관을 해설한 저술로서 출간된 해(1967)에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각각 회갑과 고희에 즈음하여 출간된 <한국불교연구>와 <원효사상연구>은 그동안 발표한 논문들을 주제별로 집대성한 것으로서 그의 일관된 학문적 관심과 연구성과를 일목요연하게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는 저작들이다.

원효는 불교사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위대한 사상가이며, 한국불교의 사상적 박통을 개창한 인물이다. 원효를 제쳐놓고 불교사상사나 한국불교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원효에 대한 학문적, 철학적 연구는 이박사의 연구 이전까지 매우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박사는 세계적으로 원효 연구의 제1장을 열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며 국내외를 통틀어 이 방면의 최고 권위자라는 데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원효의 주요 저술들에 대한 번역과 해설을 남기는 한편, 수많은 논문을 통해 원효사상이 한국불교사 뿐 아니라 불교사상사 전반에서 갖는 중요한 의의를 밝혔다. 그는 또한 이 원효사상이 단순히 역사의 유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살아 있는 정신적 지표로 되살려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 가능성에 대해서도 과감한 철학적 모삭을 하였다. 원효에 관한 그의 저술들은 꼼꼼한 텍스트 분석과 더불어 수맣은 창의적 해석들을 담고 있어서, 앞으로의 원효연구에 귀충한 지표가 된다.
이박사의 이러한 학문적 관심과 성과는 올해 출간된 <원효사상연구 Ⅰ>에 그 일부가 집약되어 있다. 회갑 이후 지난 10여년간에 쓰여진 30여편의 논문을 수록한 이 책은 이박사의 원숙한 학문과 지칠 줄 모르는 학문적 정열을 잘 보여준다.

이박사는 고희를 넘긴 지금도 쉬지않고 학국불교와 원효사상의 연구에 정진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20여년전 자신이 창립한 한국불교연구원을 중심으로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는 한편, 대중교육을 통해 불교에 대한 기복적이 아닌 철학적 이해의 고양과 불교의 생활화를 꾀하고 있다. 또한 불교연구의 창의적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면서 국제학술회의 개최 및 연구지 <불교연구> 발간을 통해 후진 양성과 원효사상의 세계화와 현대화를 위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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