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hon Kim Sungsoo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제7회-교육부문


학교법인 서강대학교
학교법인 서강대학교(재단 이사장 안병태 신부)는 한국근대화의 여명기였던 1960년4월 대학의 문을 연 이후 오늘에 이르는 30여년 높은 교육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나라 대학교육의 발전을 선도해 왔다. 서강대학교 재단은 세계전역에 걸쳐 2백여개의 대학과 약 4백개의 중등교육기관 등을 운영하고 있는 카톨릭교회소속 예수회의 기획과 헌신으로 성립되었기에 예수회 교육기관 450년 전통인 "학문의 질적 수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서강대학교는 학생들에게 지행의 겸비를 요청하며 교수는 학생들이 지식의 응용에 자신을 갖게 하기 위한 특별지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카톨릭 교육기관으로서 서강대학교는 학생들에게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정의와 사랑에 대한 신념의 터득을 요구한다.

서강대학교재단은 이같은 교육목적을 위해 엄격한 학사제도를 과감히 채택했으며 빼어난 교수진을 확보하고 우수한 교육시설을 갖추는데 전력했다. 규모면에서 보아 23명의 전임교수, 158명의 신입생으로 출발한 서강대학교가 오늘날 총 2만5천평의 다양한 건물에 6개 단과대학 21개 학과의 6천5백명 학부학생과 대학원과 5개 전문대학원 2천여명의 대학원생이 재학하는 명문대학교로 발전함에 있어서 재단의 기여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특히 대학건물의 건축비는 전액을 재단에서 지원했을 뿐 아니라 초기에는 대학운영비도 85%를 재단에서 충당했다. 재단의 주축이 되는 예수회 소속 신부들은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청빈 검소한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사표적 역할을 수행했음은 우리의 기억에 길이 남을 것이다.

서강대학교의 학풍에 미친 재단의 영향 또한 현저하다. 예수회의 교육이념은 학생들에게 지적 도덕적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며 전문인보다는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데 주력한다. 학사경고제도와 FA(failure because of absence)제도로 대표되는 출석제도나 교양 교육을 중시하는 교육과정과 부전공제도는 물론 회화중심의 영어교육이나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학생생활연구소의 기능도 재단의 교육이념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국제화 추세에 발맞추는 서강대학교의 노력도 주목할만하다. 13개국 29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으며 예수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전세계 2백여 개 대학과의 형제적인 유대는 서강대학교의 자랑이기도 하다.

서강대학교재단은 지난 30여년간 우리의 험난했던 정치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오직 재단설립의 목적인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대학교육을 이땅에 착근시키기 위해 헌신적 노력을 했으며 마침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한국의 주목받는 "지성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서강대학교는 지난 30여년의 교육경험을 거울삼아 더욱 모범적인 사학의 명문으로 부상하여 이 나라 대학교육의 견인역을 하리라 확신한다.


산업기술부문


김향수선생
김향수선생은 1960년대 후반 우리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공업발전과 수출신장에 있다는 확신을 갖고 스스로 그 일에 전력투구했다. 이를 위해 김선생은 세계일주 산업시찰에 나섰으며 당시 미국에서 추진하던 아폴로계획을 보고 느낀 바 있어 반도체산업에 착수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나라 부존자원이 빈약하지만 유휴인력과 고학력인재가 많기 때문에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산업이 적절하다는 결론을 얻었으며 이에 착수함으로써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첨단기술인력을 양성하며 △외화획득을 통해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같은 신념에 따라 김선생은 1968년 3월 반도체 산업체 아남을 창업했으며 그것은 바로 한국반도체산업의 태동이었다.

그후 25년간 김선생은 EO로는 부동산투기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다른 기업인들을 외면하면서, 때로는 반도체를 모르는 사람들을 일깨워가면서 오로지 <반도체 외길>에 모든 것을 바쳤다. 이제 아남은 국내 뿐 아니라 세계 반도체 분야의 제1위 기업으로 성장하여 세계 시장 점유율 40%라는 자랑스런 자리를 확보했다.

1970년 21만불을 수출했던 아남이 92년도에는 17억7천만불을 수출했으며 그것도 단일품목 국내1위의 수출실적이었다. 창업 이후 92년까지 반도체 수출누계 102억불에 이르렀으니 김선생의 가슴에 새겼던 창업이념은 이제 굳건한 터전 위에서 보람찬 결실을 맺게 될 것으로 믿어진다.

김선생의 오늘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남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외형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사실은 김선생은 나이 60에 가까운 때에 새로운 인생에 도전을 했다는 것이다. 조로현상이 현저하여 50대 후반이면 인생의 정리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저신 풍토이다. 특히 그러한 형상이 일반화되었던 60년대 그 시절에 선생은 <인생은 60부터>라는 의지와 자세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으니 그것은 참으로 용기있는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김선생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생소한 분야인 반도체산업에 인생의 승부를 걸었다는 것이다. 지난 60년대 우리나라 현실은 반도체가 무엇인지 아는 국민으 거의 없었다. 일부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그 개념정도를 이해하는 수준이었으니 일반국민이 반도체기술이나 반도체산업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같은 상황에서 반도체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은 진실로 선견지명이 있는 선구자적 선택이었다.

참으로 용기있는 선구자적 선택을 했던 김선생은 지성일관된 노력을 반도체산업에 기울였으며 그같은 노력의 보람으로 아남은 꾸준한 성장을 계속했다. 그중에서도 74년 1월 컬러TV를 국내 최초로 생산수출하였던 일과 84년 3월에 발사된 콜롬비아호에 아남에서 생산된 반도체가 장착됨으로써 콜롬비아계획에 참여한 5만개 업체중 유일한 한국의 업체가 되었던 일 등은 우리의 전자 산업발전사에 길이 남을 자취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기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창업당시에 살던 건평50평의 2층 슬라브집에 지금껏 살면서 근검절약하는 김선생의 생활태도는 모범적인 기업인의 자세로 일컬어지고 있다.


언론출판부문


한만년선생
한만년선생은 1953년 일조각을 창업한 이래 만40년간 출판인으로 일관하여 우리나라가 오늘의 출판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해온 출판계의 원로이다. 한선생의 저서인 <일업일생>에서 술회했듯이 지난 40년간 경제적 고난이나 정치.사회적 난관을 꿋꿋이 극복하면서 오로지 <양서출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한선생이 민족문화의 발굴과 전승 및 창달을 위해 쏟은 정열은 후배 출판인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한국학이란 낱말의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1960년대 후반부터 한선생은 영리를 초월하여 한국학관련 전문도서와 학술논문집을 간행함으로써 출판을 통한 한국학의 개척과 정립에 향도적 역할을 자임했다. 한선생의 이같은 의지는 구체적으로 <한국사신론><한국사학의 방향><한국토지제도 연구>등 한국사학관련 도서 40여종과 한국사강좌(전7권), 한국사자료전집(전5권), 한국사논문선집(전6권)등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한국한 관련도서 8백60여 종을 발행하는 빛나는 자취를 남겼다.

한선생은 또 독서인구의 확대와 우리의 문화역량을 높이기 위한 어무관계잡지의 출판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가졌다. 60년대 중반에는 계간<창작과 비평>의 간행을 도와 그 잡지가 독자적인 경영력이 생길 때까지 지원을 계속하였으며 70년대에는 <문학과 지성>의 창간과 속간에 재정적 후견인의 역할을 그 경영에 자활력이 있을 때까지 꾸준한 지원을 했다. 그밖에 <어문연구>의 발행과 판매에도 주도적인 임무를 맡았다.

80년대의 <한국사 강좌>발행은 우리 역사에 대한 시민대중의 올바른 인식이 있어야 새로운 민족문화를 꽃피울 수 있다는 신념에서 출발했으며 따라서 그것은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한 전기를 마련했다. 또한 <한국사강좌>는 학술전문지도 일반시민의 곁으로 접근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금석이 되었다.

한선생이 우리출판의 국제화에 기여한 공적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한국 출판협회를 대표하여 국제출판협회의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폄으로써 국제화시대에 발맞춘 한국출판의 위상을 한단계 높이는데 기여한 바 크다. 지난 66년부터 10여년간을 유네스코 아시아지역 출판전문가로서 이 지역의 도서개발진흥계획 수립에 참여하여 한구굴판의 역량을 세계출판계에 알리는데 큰 활약을 했다.
선생은 한국문화의 해외소개와 홍보활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사 신론>(이기백), <한국광고사의 쟁점>(천관우), <한국개화사연구>(이광린)등을 영어판 또는 일어판으로 출판하여 한국의 역사를 외국인들에게 바르게 인식시키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74년 이후 일본 중국 등의 저명한 사학자들을 초빙하여 한국문화의 올바른 소개에 정열을 쏟았다.

이 같이 폭넓고 끈기있는 활동으로 한선생은 66년 서울시 문화상, 8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오늘도 <일업일생>의 거목답게 현업의 지휘자로서 건재하고있다.


학술부문


이주천선생
이주천선생은 1953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후 1958년 동 대학원 물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전임강사로 발탁되었다. 1962년 미국에 유학하여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고체물리학 연구로 196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캐나다의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연구원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금속고체와 반도체의 물서연구를 계속하였다. 1975년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과 부교수로 취임한 후 현재 반도체 재료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규소에 대한 물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여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으며 지금도 왕성한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선생은 고체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활발히 응용되고 20세기 과학 문명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반도체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오늘날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를 포함하는 전자제품의 소재인 규소의 물성을 주로 연구하였다. 특히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결정질 규소보다 성장이 용이하고 제작비용이 저렴한 차세대 반도체 소재라고 할 수 있는 비결정질 규소의 물성을 광학적 특성, 전기적 특성 및 열적특성 등을 실측하는 실험적 연구를 활발히 수행하였다. 특히 비정질규소에서 반도체에 쪼여주는 빛을 차단하여도 광전기적 전도성이 오래 유지되는 소위 지속적 광전도성 현상을 실험을 통하여 발견하고 이를 이론적으로 규명한 연구는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선생의 최근 관심사는 비정질 규소 박막 트랜지스터의 동작에 미치는 계면의 역할에 대한 것으로서 학문적인 문제뿐 아니라 응용 분야에도 연구영역을 확장함으로써 한 분야의 같은 물질을 대상으로 거의 20년간 계속적으로 연구하는 집념과 모범적 연구 선례를 남겼다.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이선생이 학술지에 발표한 연구 논문은 국내 전문학술지에 40편, 국제학술지에 77편, 국제학술회의논문집에 26편 등 모두 140편이 넘는다. 이러한 업적으로 이선생은 한국물리학회에서 제정한 논문상을 이미 1982년에 수상하였고, 1985년에는 과학기술상 중 과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한편 1980년 한국과학기술원 원장에 취임하여 당시 한국과학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통합 운영하는 행정업무도 1년여 담당하였으며, 1991년부터 2년간 한국물리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학회 발전에도 기여하였고, 1992년에는 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로 추대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 선생은 석사 70명과 박사22명을 지도하여 배출함으로써 국내학계, 연구소 및 기업체에서 활동하는 고급 인력 양성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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