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hon Kim Sungsoo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제5회-산업기술부문


김선홍(1932년9월25일생)
1958년 당시 기아산업㈜에 공채1기로 입사하여 30여년만에 그룹 회장직에 올라 우리나라 전문경영 체제에 준거를 제시한 기업인으로 기아그룹을 국내 유수의 기업그룹으로 끌어올렸다.
사장으로 취임한 1981년 기아산업의 상황은 79년 제2차 석유파동에 이은 중화학분야 투자 조정조치와 80년 자동차산업 합리화 조치로 누적적자가 무려 5백3억원에 이르는 도산 직전이었다. 그는 <새로운경영, 새로운 기술, 새로운 일터>의 경영이론을 피력하고 RCD22운동(Reasonable Cost Down-22만원)을 전개하는 한편 봉고차 판매운동을 전기아가족 차원에서 실시했다.

과감한 기술개발과 기술혁신으로 봉고를 다양화, 우리나라 자동차문화에 새장을 열면서 기업사에 길이 남을 기아 회생의 드라마를 연출하였고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혁신적 원가절감운동인RCD22운동을 추진하여 차량 가격을 대당22만원씩 절감함으로써 국내자동차업계에 자극제 역할을 했다. 또한 농촌의 실정에 맞는 다목적 트럭 세레스를 개발하는 한편 자동차 수출시장에 뛰어드는 모험을 선택, <기아신화>를 창조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그는 또 21세기에 대비한 설비투자와 기술개발 및 인재양성에 힘을 쏟아 자동차 종합기술연구소 설립, 프라이드 개발, 기술 및 경영관리의 효율화를 위한 Super Computer설치, 대체에너지 이용과 환경보전을 위한 메탄올 자동차 개발 등 기술의 기아를 지향하였다.

그는 기업이익의 사회환원, 나아가 후진들의 양성에 큰 관심을 갖고 육영문화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창업주의 유지를 받들기 위한 학산기술장학재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창녕공고와 고암중학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들 학교를 후원하고 있다. 또한 서울 오페라단의 이사장으로서 문화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기업의 이익이 공익적 차원에서 쓰여질 때 가장 값지다는 그의 경영철학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언론출판부문


박권상(1929년10월25일)
1952년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합동통신사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언론인으로의 한 길을 걸어왔다.
1958년에 세계통신사 정치부장을, 1962년 이후에는 동아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런던특파원 논설주간을 역임했다. 1980년8월 언론인 해직조치로 동아일보사를 떠난 뒤에는 프리랜서로 활약하면서 유수한 신문에 많은 칼럼을 기고했으며 지금도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로 정론을 펴오고 있다.
이상과 같은 언론인으로서의 직업적 경력 이외에 그의 업적을 몇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한국에 언론학이 도입되던 초창기인 1959년 서울대학교 신문연구소와 문리과대학에서 시간강사로 매스커뮤니케이션 강의를 담당한바 있으며, 언론과 언론학의 기초 교재로 정평이 있는 에드위 에머리의 매스커뮤니케이션 개론(1963년), 에드워드 G H 허던의 신문과 표현의 자유(1965년), 찰스 라이트의 매스컴 사회학(1967년)등을 번역 출간했다. 그리고 언론과 학문의 두 영역을 조화롭게 통합하기 위해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대학의 니만펠로 프로그램 등 여러 언론인에 대한 직업적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런던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세계적으로 유수한 연구기관과 대학들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다.

(2)1957년에 故 최병우 기자 등과 함께 언론인들의 연구 침목단체인 관훈클럽을 창설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으며 오늘까지도 계속 이 클럽의 발전에 기여해 오고 있다. 또한 1989년 최병우기념사업회를 발기하여 회장직을 맡아 최병우 기자의 투철한 기자 정신을 기림으로써 후배 언론인들에게 직업정신과 윤리의식을 고취시키는 사업에 헌신하고 있다.

(3)본격적인 시사주간잡지인 시사저널의 창간에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편집인겸 주필로서 시사저널이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4)이 나라의 민주화와 언론자유를 위한 글들을 모아 11권의 저서를 펴냈는데 이 저서들은 그의 뛰어난 언론인으로서의 통찰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 저서는 학문적인 성취라기 보다는 언론인으로서 시대를 통찰하여 정론을 편 논설이며 칼럼이므로 그를 언론인으로서 평가하는데 가장 적합한 업적이 될 것이다.


공공봉사부문


김기창(1913년2월18일생)
동양획단의 거장이자 한국농아복사회 회장인 운보 김기창 선생은 본인이 청각장애인이면서도 자신의 장애를 예술로 승화시킨 장본인이자 우리나라 농아복지사업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다.
청각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홍익대와 수도사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세종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개인적 입지면에서도 뛰어난 장애극복 의지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1970년부터는 자신의 모든 정력과 재력을 같은 처지에 있는 전국 35만 농아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투입하여 장애인 복지면에서 불모지이던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조직적인 청각장애인 복지 터전을 마련하였다.
현재14개 시도지부의 전국적인 규모를 갖춘 한국농아복사회는 농아인들을 위한 다목적적이고 포괄적인 복지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1985년 이래로는 맑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농아인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청음회관을 설립하여 1일1백50명의 농아인들에게 교육적 재활적 및 의료적 측면의 복지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사회참여의식을 고취시킴은 물론 잠재능력을 개발시켜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다.

특히 청각장애 청소년들을 위한 기술교육훈련원인 운보원을 설립하여 목공 축산 원예 제복 전산기법 등의 다양한 기술을 교육하고 있으며 농아인 부모를 둔 어린자녀들에게 꼭 필요한 특수 조기교육을 하는 유아원을 청주 전주 인천에 개설하여 이들 어린이들이 건실한 사회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교육, 보호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그는 세계농아연맹 문화예술분과 부위원장으로 재직하는 등의 국제적 교류 활동을 통하여 우리나라 농아인들의 국제적 지위 향상과 이들을 위한 문화 및 복지사업의 현대화에 힘쓰고 있다.
일제 때 조선미술전에서 연4회 최고상을 받아 추천작가가 된 이후 활달한 필력의 작품세계로 동양획단의 대가이기도 한 선생은 남을 위한 봉사에서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으며 봉사정신이 함께 해야 진정한 예술가가 된다는 신념을 갖고 예술가의 길과 사회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문학부문


박재삼(1933년4월10일)
맑고 순수한 시심을 가지고 평이하고도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있는 박재삼 선생은 1933년 일본에서 출생하여 경님 삼천포에서 자랐고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53년 <문예> 11월호에서 <강물에서>라는 시조와 1955년 <현대문학>11월호에 <정적>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1957년에 <춘향이 마음> 으로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시집 <춘향이 마음>(1962년)에 담긴 시편들은 우리의 전통적 생활서정을 담고 있는데 1950년대의 시대적 정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비판적 모더니즘시의 흐름과는 다른위치에서 현실 문제를 인식하였다. 즉 춘향이나 흥부와 같은 고전적인 인물에 내재한 정한의 의미가 현대적 서민의 삶으로 연계되면서 고유한 지역어의 진실감을 수반한 전통적 정한의식을 보여주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시대적 국면에서도 그는 서민적 삶의 정한의식을 다루었는데 거센 비판이나 풍자가 아닌 정화의 기능을 드러내는 특이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보였는데 이러한 시적 장치로서 어머니나 누나의 여성적 삶에 내재한 부드러움과 정한의식의 결합이 보인다. 그리고 시의 율격도 순탄한 말씨의 흐름에 따랐으며 서민적 생활어를 도입하여 <…을네><…까나>등의 음상의 특성은 토속적인 지방어의 순박성을 일깨우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어서 1970년대에는 <햇빛속에서><천년의 바람>등 여러 시집이 간행되었는데 이러한 시집에서도 전통적인 삶의 인식을 깊이있게 다루면서 서정적 심화를 기하였다. 즉 <죽세강의 노래><소곡><꽃상여 곡소리>등 주목되는 작품에서 표출되는 서민적 삶의 밑바닥에 깔린 정한의식은 소외층의 내면세계를 포착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또한 그의 시세계에 보이는 자연의식은 인간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의 이질성을 인식하고, 그 모순의 발견과 나아가 융합을 통한 초월을 기도한다. 이런점에서 동양적 달관의 의미도 깃들여져 있으며 자연의 본성에 동화하려는 의식이 시집 모두에 깔려있다.
그리고 1970년대에서 1980년에 걸친 시세계에는 사회적 부조리를 인식하면서도 직접적인 비판이나 고발보다는 유교적 의미에서의 부끄러움을 <떳떳함>에 비추면서 서정적 화자의 내면적 성숙을 기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1980년대의 작품집들 중에서 <비 듣는 가을나무>에 보인 <돌팔매>에서는 욕망과 운동의 의미도 끝내는 자연적 질서에 동화되는 사실이 주목되며 <제일 큰일>같은 작품에서도 욕망을 뜻하는 <손>의 부끄러움이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서 인간의 한계인식이 밝혀지고 자연에 동화하려는 시적 지향이 보인다.


학술부문


백용균(1925년8월12일)
백용균 선생은 1950년 서울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후 54년 미국 텍사스대학교 대학원에 유학, 세계적으로 저명한 W.S.Stone 교수의 지도하에 동물유전학을 전공하였다. 그후 5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국내에 서식하는 야생 초파리의 분류 체계를 완성 발표하였으며 초파리 자연집단 내에 잠재되어 있는 유전성 변이에 관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 연구는 <한국 초파리 집단내의 유전적 변이>라는 논문으로 결실되어 1960년 저명한 국제유전학 학술지 <Evolution>에 발표, 우리의 유전학 수준을 국제적으로 인정 받게 하였다.
그후 30여년동안 전남대와 연세대 생물학 교수, 하와이대학 종신교수, 한양대 의과대학 유전학교실 주임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제적 교류를 통한 연구에 정진해왔다. 그 결과 논문1백10여편이 대부분 저명한 국제학술지에 발표되었으며 저서10권과 종설11편 등의 연구업적을 남겼다.
이와같은 일련의 연구를 통하여 초파리 집단에서 유전적 변이에 관련된 유해유전자가 집단내에 일정한 빈도로 존재한다는 보유메커니즘에 대한 가설을 제창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이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염색체 연구를 통한 세포유전학, 효소다변현상에 의한 생화학적 유전학, 그리고 최근에는 P-element의 염기서열에 대한 분자유전학 연구를 계속하여 이를 입증함으로써 그의 학설을 불후의 업적으로 남도록 하였다.
그의 중요한 연구 업적을 간추리면 35년간(1956~1991)의 초파리 집단 유전학에 관한 기초적 연구와 최근 10년간(1980~1991)의 인류 유전학에 관한 기초 및 실용적 연구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 연구는 세포학적 생화학적 분자생물학적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그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착수한 인류유전학은 사람의 염색체 이상과 효소결핍에 의한 선천성 질환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유전병의 진단과 예방, 치료에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같은 업적은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아 1970년 하와이대 유전학과의 요청으로 종신교수로 부임하였고 1988년 이래 국제유전학 학술지 <Evolution Biologica>의 국제편집위원, 미국 NSF지원 연구비의 책임연구원, 많은 국제학술회의의 초청연사, 독일과 미국 학자와의 국제공동연구 등으로써 국위를 선양하였다.
또한 국내에서는 75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한양대 의대에 유전학 교실을 창설하여 많은 후학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78년에는 한국유전학회를 창설하여 1,2대 회장과 편집위원장을 역임하였고, 80년에는 한양대 대학병원에 유전상담실을 개설하여 유전학을 임상의학에 도입하여 한국유전학의 발전에 열정을 쏟아왔다. 이러한 업적으로 연세대학교 학술상, 한양대학교 교수연구상, 하은 생물학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이 수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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